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태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개봉(2월 3일 예정)도 하기 전에 논란에 휩싸였다.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최근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낸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인 ‘김 부장’ 역의 배우 백윤식(58). 그는 “이 역을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번민도 많이 했지만 연기를 위해 털어버렸다”고 말했다. 10일 그를 만났다.
○ “현대사 다룬 작품이라 고민 많이 했지만 털어버렸다”
―10·26을 어떻게 보는지요.
“나는 실제 그 시대에 청년기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시 나는 배우 10년 차였죠. 아침에 길을 가다 신문호외를 보고 알았어요. 쇼킹했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고…참 불행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죠.”
권주훈 기자
―보혁 구도로 갈린 요즘 국내 상황을 감안할 때 영화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데….
“너무 가까운 현대사를 다룬 작품을 선택한다는 게 솔직히 고민이 됐어요. 번민이 많았지만 털어버려야 했지요. 그런 걸 의식하다 보면 연기 못해요. 난 원래 ‘정치’란 말도 듣기 싫은 사람이거든요.”
백윤식은 비슷한 연배의 동료 연기자들과 달리 뮤직비디오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 광고에까지 나올 정도로 젊은층에겐 ‘신선하고 다소 엽기적인’ 배우로 인식돼 있다. 그는 이런 위치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해 “내가 (영화라는 음식에) 영양가 있고 몸에 좋은 재료가 된 건 낙천적인 내 성격 때문이었다고 봐요. 시기를 잘 타는 것도 같고. 이 재료로 맛있게 만든 건 머리 좋은 감독들이고…”하며 쌍꺼풀 두터운 눈을 내리 감았다.
―이 영화가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배우 입장에서 대답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나는 그 일로 세상을 등지거나 상처 받은 분들에게 옷깃을 여미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김 부장’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요.
“배우가 연기하는 건 가수 모창(模唱)하는 것과 달라요. 난 창작활동을 하는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발을 담갔지. 당시에 관한 기록을 일절 참고하지 않았고. 모델을 따르는 게 아니에요. 소재만 가져왔을 뿐 나는 완전히 영화 속 인물로 갔지. 책(시나리오를 지칭)을 보니까 내 캐릭터에 대해선 ‘담백’ ‘진솔’ ‘담담’이란 몇 개의 단어가 떠오르더군. 하지만 (김 부장) 캐릭터는 정말 (연기)할수록 오리무중이었지요. 누가 답을 내 줄 수도 없고. 시나리오에 있는 인물에 내가 영양주사를 놓은 거지.”
―‘김 부장’을 연기하고 나니 그 인물을 이해하게 됐습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
○ “나빠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그게 백윤식이죠”
‘지구를 지켜라’(외계인 역), ‘범죄의 재구성’(사기꾼 역) 등 최근 영화에서 그의 역할 및 캐릭터는 두 가지 공통점을 보여 준다. 하나는 결코 아버지 역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더 중요한 건 ‘알고 보면 아주 나쁜 자인데 그 순간만큼은 진실한 것 같다’는 점이다.
백윤식은 이에 대해 “결국 내가 ‘비주류’ 쪽이란 얘기지. 하지만 나는 나빠도 결코 미워할 수는 없는 캐릭터를 표현해요. 난 실제론 법 없이도 살고요. 항상 불이익을 당하는 쪽이죠”라며 웃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