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튜브엔터테인먼트
평자(評者)는 대로행이다. ‘큐브 제로’와 같은 미로에서 헤맬 일이 아니다. 영화 ‘큐브’ 시리즈의 정육면체 방에 갇히면 영화 평을 쓴다는 게 난망한 일이 되고 만다. 이 시리즈에서 인용되는 이상야릇한 수학공식은 결국 맥거핀(MacGuffin·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행동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내 독자와 관객들로 하여금 엉뚱한 결말을 상상케 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시리즈 영화가 하려는 얘기는 딴 데 있다. 그것을 찾는 일이야말로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해답과 같은 것이다.
1999년 캐나다 빈센조 내탤리 감독의 기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영화 ‘큐브’는 2002년 안드레이 세큘라에 의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가 다시 이번에 원산지인 캐나다로 돌아왔다. 이번 감독은 어니 바바라시. 캐나다에서 할리우드로, 그리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것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대개의 작품들은 할리우드로 가서 리메이크가 되면 많은 부분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저예산의 지적 스릴러였던 내털리 감독의 원작은 할리우드에서는 하드고어(피와 살점이 튀는 잔혹한 내용의 영화)풍의 미스터리 스릴러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기에다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일종의 음모이론까지 곁들여졌다. 관객들이 보기엔 좀 더 편해졌지만 그렇고 그런 대중영화로 변질됐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다시 원작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한마디로 원작처럼 약간 골치가 아파졌다.
‘큐브’ 시리즈는 한마디로 아이덴티티에 대한 문제다. 이번 ‘큐브 제로’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정육면체 방에 갇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다. 문제는 모두들 누군가에 의해 기억이 삭제된 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자신이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서로 극도의 불신감과 극단적인 소통 부재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존재인가가 ‘큐브’시리즈가 궁극적으로 찾으려는 해답이다. 원작인 ‘큐브’는 방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이야기의 개연성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에 대한 극단의 공포가 사람들을 어떻게 광적으로 만드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국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인간관계라는 것이 소통이 부재해졌을 때 얼마만큼 치명적인 상태가 되는지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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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과 달리 이번 ‘큐브 제로’는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던 2편의 마지막 내용을 슬쩍 가져와서는 왜 이들이 정육면체 방에 갇히게 됐는지 그 이유를 드러낸다. 결국 지금의 사회는 이른바 ‘빅 브라더’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두고 ‘큐브’ 시리즈의 ‘프리퀄’(prequel·원래의 이야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얘기를 다루는 속편. 일종의 본편에 해당한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서적으로는 이 ‘큐브 제로’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 ‘큐브’를 보든가 혹은 ‘큐브2’를 보면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계속해서 동어반복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같은 얘기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봐야 하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영화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 수 있다. ‘큐브’ 시리즈는 1편이든 2편이든 저예산의 비상업영화였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관객들이 찾은 작품이 아니었다. 그러니 다소 중복되는 영화를 내놓는다 한들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할 점은 그렇다고 이 ‘큐브’ 시리즈가 내리 3편을 일부러 찾아서 볼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3편을 계속해서 본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자칫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폐소공포증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21일 개봉. 18세 이상.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