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생성됐다가 소멸되는 디지털 자료들. 종래의 오프라인 자료들과 달리 키보드 조작하나만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래픽 이진섭 기자
‘어라? 자료가 사라졌네?’
몇 년 전 박사 논문 준비를 위해 평소 자주 찾던 사회문제 관련 사이트를 방문한 경희사이버대 민경배 교수(38·NGO학과). 하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 운영되던 이 사이트는 온 데 간 데 없이 폐쇄되고 그 안의 모든 내용도 찾을 길이 없었다.
운영자가 비용문제 등 여러 사정 때문에 사이트를 폐쇄했던 것.
“하루에도 수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각종 사이트와 그 내용들이 그때서야 ‘소중한 정보였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죠. 옛날 고서들이나 유물들만 역사고, 자료인 것이 아니라 지금은 디지털 자료들도 보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 교수는 이때의 당혹감을 주변 사람들과 시민단체 등을 만난 자리에서 토로하고 공감을 얻었다. 이것이 ‘정보 트러스트(trust) 운동’의 시작이었다.
○ 디지털 문화유산 지키기
2003년 6월 다음세대재단, 문화연대, 사이버 문화연구소, 정보공유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 6개 시민단체가 ‘정보 트러스트 운동 추진실무위원회’(www.infotrust.or.kr)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디지털 정보가 대량으로 생성되면서 아주 빠르게 폐기되는 현상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기록되는 세상에서 이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아마 100년쯤 후에 지금 세대는 ‘잊혀진 문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아틀란티스 문명처럼 말이죠.”
정보 트러스트 운동본부 이규원 간사(29)의 말이다.
인터넷상의 자료 유실은 말이 거창할 뿐 사실 누리꾼(네티즌)이라면 한 번쯤 겪어본 일.
가입한 동호회나 사이트가 폐쇄돼 각종 게시물이나 회원정보, 자료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경우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 중의 하나다.
물론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올린 글이나 자료들은 ‘정보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 교수는 ‘홍길동전’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당시의 사회풍자적인 글들이 만약 21세기에 나왔다면 분명 책보다 인터넷에 먼저 기록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쓰는 즉시 정보와 자료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정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들도 많죠. 방대한 자료들을 모두 보존할 수는 없겠지만 인터넷 소설, 동영상, 사회 비평, 문화 등 각 분야 자료가 모이는 사이트들은 보존돼야합니다.”
○ 잃어버린 정보를 찾아서
운동의 주요 방향은 주요 디지털 자료의 보존과 소실된 중요 자료들에 대한 복원으로 나뉜다.
지난 1년여 간은 이 사업을 위해 기본 청사진을 마련한 시기.
일단 완벽하지는 않지만 국내 인터넷의 역사가 망라된 ‘인터넷 연표’의 작성을 끝마쳤다. 디지털 역사를 기술, 문화·미디어·인터넷 일반, 법·제도·정부, 정치·사회·시민운동, 기업·경제 등의 부문으로 나눠 인터넷과 디지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잃어버린 자료를 찾으려면 일단 무엇이 존재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디지털 유산을 찾기 위한 일종의 지도 같은 개념이죠.”
연표를 보면 디지털, 컴퓨터와 관련된 법제도의 변천, PC통신, 인터넷의 발전사에서부터 각종 유명인들의 홈페이지 개설시기, 전자화폐, 인터넷 홈쇼핑 등 우리나라 디지털 발전사를 외국의 것과 비교해 한눈에 알 수 있다.
복원 사업도 느리지만 조금씩 성과를 얻고 있다.
첫 번째 성과는 1996년 창간된 국내 최초의 웹 매거진 ‘스키조(schizo)’의 상당수 자료를 찾아낸 것. 문화 사회 비평 사이트였던 스키조는 당시 통쾌한 사회 풍자로 하루 조회수가 10만 명에 달한 ‘사이버 논객’들의 광장이기도 했다. 스키조는 24호를 마지막으로 폐간(사이트 폐쇄) 됐으나 이번에 12호까지의 완벽한 자료를 당시 운영자를 찾아내 복원했다. 또 PC통신 전성기를 이끌던 ‘하이텔’의 게시판인 ‘플라자’에 기록됐던 토론 자료들도 일부 찾아냈다.
물론 이미 사이트가 폐쇄된 상황이라 과거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운영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자료를 찾았거나 한 블로그에서 과거 PC통신 게시물을 발견해 찾는 정도의 수준이다.
○ 자발적인 보존운동 확산
‘과연 무엇이 디지털 정보냐’에 대한 기준이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복원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다.
하지만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면 보다 많은 자료들이 보존되고 복원될 전망이다.
이를 위해 이들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디지털 자료 납본 제도’.
쉽게 말해 시시각각으로 생성되고 변하는 인터넷 자료들을 일정 시점 간격으로 정리해 보관하자는 것.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납본법을 개정해 온라인 디지털 자료까지 납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 디지털 유산 보존을 전담할 수 있는 정부기구의 설립도 추진 중이다.
갈 길은 멀지만 이 운동에 동참하는 단체도 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은 지난해 6월부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온라인 공간을 보존해 정보 트러스트 운동본부에 전달하고 있다.
기부된 내용들은 당시 검색 순위 상위 50개 사이트를 비롯해 온라인 게임, 얼짱 사진, 최고 인기 검색어, 검색 금칙어, 온라인 뉴스, 인터넷 라이프 동영상 등 공개가 가능한 각종 자료들이다.
다음 측은 “매년 인터넷 기록 캠페인을 개최하고 앞으로는 일반 누리꾼들도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로 확대 진행할 계획”이라며 “회사가 보관하는, 일반에 공개할 수 없는 자료들과는 별개의 사업”이라고 말했다.
○ 디지털 유산은 인류 문화유산
지난해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조사에 따르면 매일 인터넷상에서 1500만 장 분량의 정보가 생산되지만 평균 수명은 70일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 미국 의회도서관 발표에 따르면 1998년에 존재했던 인터넷 사이트 중 44%가 1년 후에 사라졌으며 2002년 인터넷 사이트의 평균 수명은 44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넷은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를 쏟아내죠. 그런데 키보드 조작 하나로 한순간에 그런 기록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세요. 만약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이 손가락 하나로 쉽게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이 간사는 “문민정부 시절 최초로 개설됐던 청와대 홈페이지내의 수많은 자료들, PC통신 시절의 엄청난 콘텐츠와 게시물 등 역사가 될 만한 자료들이 너무도 많이 사라졌다”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생성속도만큼 빠르게 자료들이 소실돼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 문화유산을 기록한 수단이 과거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CD롬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인터넷이 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