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하후영이 수레 모퉁이를 돌아 뒤쪽에 이르니 한왕이 공자 영(盈)을 발로 차서 수레에서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후영은 급히 팔을 뻗어 공자를 받고, 이어 한왕이 내던지는 공녀(公女)까지 받아 수레의 앞자리에 다시 얹으며 소리쳤다.
“대왕, 이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리 달아나는 일이 급하고, 공자와 공녀 때문에 말을 빨리 몰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이 둘을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왕은 성난 눈으로 하후영을 노려볼 뿐 말이 없었다.
마부 자리에 돌아간 하후영은 채찍을 휘둘러 다시 말을 몰았다. 한왕의 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섭게 채찍질했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수레는 빨라지지 않았다.
오래잖아 다시 하후영의 등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났다. 하후영이 돌아보니 어느새 한왕이 공자와 공녀를 수레 밖으로 내던지려 하고 있었다. 하후영은 급하게 고삐를 당겨 수레를 세우고 수레 아래로 뛰어가 한 번 더 내던져진 공자와 공녀를 받았다. 그리고 앞서처럼 둘을 수레 앞자리에 옮겨놓자 이번에는 한왕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하후영, 이놈. 내 칼에 죽고 싶으냐? 다시 한번 방자하게 내 뜻을 거역하면 목을 베겠다!”
하후영은 아무 대꾸 없이 수레만 몰았다. 그러나 한왕의 말은 결코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 칼을 칼집에 꽂은 한왕은 또다시 두 자식을 수레 앞자리에서 뒤쪽으로 데려갔다. 하후영이 세 번째로 수레를 세우고 뒤쪽으로 달려가 내던져진 아이들을 받았다.
한왕이 다시 칼을 뽑아들고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하후영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어제 하루만 해도 과인의 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장졸들이 죽을 구덩이로 뛰어들었느냐? 그렇게 건져 놓은 과인의 목숨을 저 못난 것들 때문에 잃어도 되겠느냐? 어서 그것들을 수레 아래로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
그러나 다시 말을 채찍질한 하후영은 앞만 바라보며 수레를 몰았다. 한왕이 칼을 쳐들었으나 차마 내려치지 못했다. 혀를 차며 칼을 내리더니 칼집에 도로 꽂았다. 뒤처져 적의 길목을 막은 군사들이 죽기로 싸워준 덕분인지 그때까지도 적의 추격은 없었다. 그게 한왕을 다소 진정시켜 한동안은 수레가 느려도 잘 참아냈다.
하지만 말이 지쳐 수레가 더욱 느려지고, 희미하게나마 뒤쫓아 오는 적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자 한왕은 다시 다급해졌다. 이번에는 칼로 수레의 채를 찍으며 하후영에게 바로 얼러댔다.
“수레를 세워라. 저것들을 내려놓고 가자! 이번에도 과인의 뜻을 어기면 정말로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칼끝을 하후영의 목에 들이대다가 다시 좋은 말로 달래기도 했다.
“저것들 이마에 내 자식이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만 입을 열지 않으면 적군에게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사로잡힌다 하여도 이미 아버님 어머님에 여후까지 끌려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 과인이 무사히 관중으로 돌아가면 자연 저들을 구해낼 방도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하후영은 여전히 앞만 보고 수레만 몰았다. 그 뒤로도 한왕은 대여섯 번이나 더 하후영의 목에 칼을 대고 얼러댔지만 마찬가지였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