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46억 년 지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리 우쭐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6500만 년 전 천재지변으로 공룡을 포함한 거대한 파충류들이 사라지는 엄청난 사건이 없었다면 인류는 탄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공룡 인간’이 출현했을지 모른다.
사실 공룡이 사라진 광활한 신천지에서는 포유류가 폭발적으로 진화했다. 약 500만 년 전 숲에서 살던 영장류 중 일부가 동아프리카의 기후가 변하면서 형성된 사바나지역으로 걸어 나와 직립을 시작했다.
직립이란 앞발을 보행의 역할이 아닌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손을 도구를 만드는 일 등에 사용함으로써 이차적으로 머리도 발달할 수 있다. 따라서 동물이 뇌가 발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2족 보행인 셈이다. 실제 포유류는 4족 보행 동물이며 우리 인류만이 2족 보행을 한다. 하지만 공룡은 처음 진화했을 때부터 2족 보행 동물이었다.
앞발이 자유로운 육식공룡 중 한 그룹은 앞발을 날개로 변화시켜 현재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새들이다. 이런 진화는 생존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앞발의 용도를 제한하고 말았다.
하늘을 날 수 없던 공룡들은 땅 위에서 최선책을 찾았다. 이들 중 ‘트로오돈(Troodon)’이라는 소형 육식공룡은 뇌와 몸무게의 비율이 1 대 1000으로 모든 공룡 중 가장 크고 실제 조류나 포유류에 가깝다. 또한 타조에 버금가는 큰 눈은 앞으로 쏠려 있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덕분에 앞발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다.
트로오돈은 ‘공룡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졌던 셈이다.
만약 빠르게 진화하고 있었던 이런 공룡이 6500만 년을 더 진화할 수 있었다면 점점 커지는 뇌를 지탱하기 위해 목은 짧아지고 몸은 더 꼿꼿한 직립 자세를 가졌을 것이다. 꼬리는 불필요해져 퇴화되고 발가락이 아닌 발바닥으로 걸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공룡 인간’들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 포유류들은 TV 외화 ‘V’에서처럼 이들의 간식거리로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융남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 ylee@kiga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