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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허태균]이젠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나자

입력 | 2005-01-13 18:12:00


진보와 보수, 친노(親盧)와 반노(反盧), 친미와 반미, 친북과 반북 등이 우리사회를 극단적인 대립 진영으로 나누고 있다. 보수이며 친노이거나, 친미면서 친북인 ‘짬뽕’의 사람들은 점점 줄어 가며 그 존재의 가능성도 희박해지는 듯하다.

이런 이분법의 시작은 어디일까. 역사적으로 더 깊은 뿌리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왕성한 번식력을 가진 이분법의 씨앗은 2003년 대통령선거였다고 본다. 그 이전에도 대선에 따른 갈등이 있었건만 왜 유독 2003년 대선에서 뿌려진 갈등의 씨앗이 문제가 된단 말인가. 나는 그 이유를 2003년 대선 이후 우리 국민에게 본인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만 하는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이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찾고 싶다.

사람들은 대선이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가장 적합한 후보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투표는 그리 신중하지 않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몇 만 원짜리 생일선물을 고를 때보다 대선 후보자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고 고심해서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국민은 자신이 투표한 후보에 대해 사실 잘 모를뿐더러 먹고사는 데에 큰 영향만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된다 하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대선과 총선은 결과가 어떻게 나왔든지 여야 간 정권교체,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따른 갈등 이외에는 두드러진 갈등의 여파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2003년에는 대통령도, 여당과 야당도 모두 대선에서 사용한 이분법의 씨앗을 사장(死藏)시키지 않았다. 1년 뒤의 총선을 의식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더욱더 강한 이분법을 키웠다. 그 과정에서 정치인이나 일반 국민은 잘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기회가 너무 많았다.

2003년 8·15광복절에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보수단체의 집회와 종각에서 열린 진보단체의 집회(사진)는 우리 사회 갈등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면 할수록 더 극단적인 의견을 가지게 되고 신념도 굳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지난 1년여 동안 정치인과 일반인, 심지어 언론까지도 주위 사람과의 토론, 인터넷 공방 등을 통해 무수히 많은 기회에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도 지금까지 견지해 온 의견과 상충되는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민망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제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 아닌가?

이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철면피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판단착오를 할 수 있다.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해 왔던 말은 모두 하지 않은 척하고, 과거 자신의 말에 구속됨이 없이 진정으로 우리의 밝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가를 논의해야 한다. 더 멀리 가 버리기 전에.

허태균 한국외국어대 교수 사회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