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새해는 종로 사거리에서 가장 먼저 열린다. 세모의 어둠을 뚫고 보신각종이 울리면 10만 인파와 수백만 TV 시청자의 눈과 귀가 이곳에 집중된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아쉬움으로 묵은해를 보내고 기대로 새해를 맞는다. 그러면서 명절날 잊었던 종갓집을 찾은 사람처럼, 강남에 밀리고 ‘서울혐오증’으로 구박받게 된 강북의 한 사거리의 존재를 새삼 의식한다.
▷미국의 새해는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에서 열린다. 브로드웨이, 7번가가 교차하는 맨해튼의 오거리다. 수십만 인파의 카운트다운 속에 ‘뉴욕타임스’ 옛 사옥에서 불 밝힌 유리공이 내려오고, 해가 바뀌는 순간 샴페인이 터지고 입맞춤이 교환된다. 우리처럼 높으신 어른의 거룩한 ‘신년사’는 없다. 대신 요란한 거리 파티가 밤새 진행된다.
▷새해맞이의 내용과 무대는 달라도 양쪽 모두 시간과 공간, 나와 공동체가 일체가 되는 강렬한 순간을 맛본다. 현대인에게는 드문 경험이다. 속도와 변화와 이동성에 중독된 현대인은 달리는 열차의 승객처럼 사물을 흐름으로 이해한다. 장소는 그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뿌연 풍경이고, 도시 공간은 평당 가격으로 가늠되는 부동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집단적 통과의례의 현장에서 공간의 고정성은 시간의 유동성을 부각하고, 시간의 유동성은 다시 공간의 장소성을 증폭시킨다.
▷디지털 시대에도 전통적 장소를 무대 삼아 새해맞이가 펼쳐지는 것은 시사적이다. 정보혁명은 공간적 분산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방치됐던 도심에 사람과 돈을 끌어들여 이를 ‘소생’시킨다. 타임스스퀘어는 서민 밀집지역에서 엘리트의 사무공간으로 변했다. 종로통 주변에도 초대형 재개발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사례에서 보듯 ‘도심 소생’의 그림자는 길고 춥다. 중간 계층의 일자리가 줄고 소득이 양극화된다. 개발의 빛에 현혹돼 그 빛이 만들어 낼 그림자를 도외시하지 않기를 당국에 바란다.
강홍빈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교수 hongbink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