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철 씨
정통 문학이 아니어서 읽을거리로만 여겨지던 중국 무협소설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왔다.
중문학자 유경철 씨(36)는 ‘사조영웅전’ ‘의천도룡기’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 무협소설을 펴낸 작가 진융(金庸·81)의 작품을 분석한 논문 ‘김용 무협소설의 중국 상상(想像) 연구’로 최근 서울대 중문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다. 지도교수는 2003년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라는 책을 낸 같은 과의 전형준(필명 성민엽) 교수. 그동안 한국에서는 진융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 2편만 있었을 뿐이다.
유 씨는 이 논문에서 중국 무협소설이 제국주의 열강에 침탈당하고 내전으로 인해 대륙과 대만, 홍콩 등으로 분리된 중국인들의 정신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실제 역사와는 다른 ‘상상의 공동체’로서 중국의 모습을 생산해 냈다고 분석한다.
“무협소설은 적아(敵我)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아’의 승리로 귀결시키는 방식으로 중국인들의 패배의식과 정신적 외상을 상상적으로 치유하고자 했습니다. 무협소설은 이를 위해 ‘강호(江湖)’와 ‘협(俠)’의 개념을 차용했지요. 진융은 한족(漢族) 대 이민족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에 주목해 상상의 주체인 협을 중심으로 한 강호라는 세계를 통해 대안적 중국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협객은 무기력한 한족 국가를 대신해 이민족과 싸우고, 강호는 나름의 규율과 역사를 가진 독자적이고 완결된 세계지요.”
유 씨는 진융이 중국의 정치 군사적 패배와 좌절을 상쇄하기 위해 남성 중심의 ‘양강(陽强) 중국’ 개념과 전통문화를 중시하는 ‘문화 중국’의 개념을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제국주의의 침탈로 거세된 중국의 ‘남성성’을 진작하기 위해 여성을 숭배 희생 처벌 용서의 방식으로 남성의 질서에 포섭했으며, 전통문화의 심오함과 심미성을 극도로 부각해 중국인의 심리적 우월성을 작품에 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진융의 상상에 동참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들의 원래 정체성, 즉 상상된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유 씨는 “중국인들이 무협을 통해 표상하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살펴보고 싶었다”며 논문의 취지를 밝혔다.
그렇다면 무협소설이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유 씨는 “진융 소설을 비롯한 중국의 무협소설은 한때 한국인이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 혹은 이미지의 역할을 했지만, 한국 작가의 무협소설이 등장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최근 한국 작가의 무협소설에는 세대 간 갈등 같은 한국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이 투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진융의 작품 중 협객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설산비호(雪山飛虎)’를 가장 좋아한다는 유 씨는 앞으로 한국에서 무협소설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더욱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진융은 누구?▼
홍콩에서 활동하는 중국 작가. 그의 작품들은 1980년대 한국 출판계에 무협소설 돌풍을 일으켰고 중국에서는 해적판을 포함해 수억 부가 팔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중국 베이징(北京)대는 진융 연구과목인 ‘김학(金學)’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고 있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중문과는 그의 소설을 부교재로 채택할 정도다. 특히 그의 ‘사조영웅전’ 등은 지난 세기 중국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된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