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가 화산 폭발에 의해 언젠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인들이 한국 땅으로 건너오게 될 것이라는 가상 시나리오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일왕도 자신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혈통이란 사실을 시인한 바 있지만 교토나 나라에 가면 한반도에서 가져간 목재로 지은 일본 고택과 절이 있을 정도로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굳이 근대화의 악몽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국경을 가까이하고 있는 나라치고 사이가 좋았던 관계는 거의 없다. 잦은 분쟁과 역사의 상처는 근대화 100년의 역사를 넘어서려는 지점에도 혈흔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한류 열풍의 바람을 타고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놀란 것은 한국인들이다. 일본 관광객들과 ‘용사마’ 열풍으로 벌어들인 외화와 시너지 효과가 자동차와 반도체 수출에만 의존하는 한국경제를 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 정도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다.
100년 전 제물포항을 열면서 근대 서구 문물이 밀려오게 된 이후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주눅 들어 있었다. 근대화란 기실 ‘서구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프로젝트였으니 청소년기에는 금발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장년이 되어서는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의 부인과 평생을 영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대통령인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짧은 한국어였다.
▼패배감에 짓눌린 ‘恨민족’▼
최근에 한반도의 산맥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아닌, 190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그려진 지도를 채택한 것이고, 그걸 백년 가까이 한반도 지도의 정본으로 삼아 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17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로는 일제강점기 개인 피해에 대한 배상 또는 보상 문제를 군사정권이 배제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60년대 한국 정부는 “개인 피해자를 대신해 국가 차원에서 일본으로부터 총액 규모의 돈을 받겠다”는 뜻을 밝힌 뒤 일본에서 받은 보상금의 2%만 개인에게 지불한 뒤 나머지를 국토산업개발에 다 썼다.
집단화된 국가주의는 국익을 앞세우면서 개인 주체의 개별적 상처를 무시해 왔다. 일제강점기와 강요된 근대화를 거치면서 한국민을 지배한 것은 민족적 열패감 같은 것이었다. ‘한(恨)’은 근대 초기 철저하게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소극적이며 자폐적인 정체성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한국인들이 억압당하면서 자신의 혈통을 속이고 일본인으로 행세하려 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 1950년대 ‘역도산’은 자신을 ‘조센진’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세계인’이란 말로 민족이란 신분을 넘어서려 했다.
그러나 한국민의 힘은 집단화된 민족주의나 폭력적인 국가주의가 아니라 내밀한 ‘부드러움의 힘’이다. 일본 관광객이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인들은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미소와 눈물, 첫사랑과 순수. 한국에서 사(士)는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에서 사(士)는 사무라이 정신, 무사를 의미한다. 칼은 결국 붓의 부드러움을 따르게 된다는 것을, 남자의 눈물은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용사마 열풍은 가르쳐준다.
▼용사마의 ‘한국적인 것’▼
대동여지도와 일본군 위안부, 역도산과 용사마. 굴곡 많은 근대사 속에서 한국민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혼미해 있었다. 역사적 피해의식에 시달려 왔다. 용사마 열풍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말이 아니다. 여론이 지나치게 과장 광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민족 정체성이란 국가주의의 전횡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개별 감정과 정서를 스스럼없이 드러낼 때 가장 ‘한국적인 것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마 열풍은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한국민의 고유한 힘과 보편 정서를 환기시킨다. 민족적 자의식은 이제 스스로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놓여 있다. 광복 60년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