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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1-19 17:52:00

그림 박순철


한왕의 명을 받은 한군(漢軍)은 밤길을 재촉해 우현(虞縣)으로 옮겼다. 날이 훤할 무렵에야 우현에 이른 한군은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현성(縣城) 서쪽 벌판에 진채를 내렸다. 그러나 한왕은 허겁지겁 서쪽으로 물러나면서도 그런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막에서 고단한 몸을 쉬려다가 마침 곁에서 시중을 들던 몇 사람을 둘러보며 푸념처럼 말했다.

“참으로 답답하구나! 쓸모없는 무리들이다. 너희와는 천하의 일을 의논할 수 없으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여겨질수록 하읍(下邑)에서 장량에게 들은 말이 더 생생하게 떠올라 해본 소리였다. 천하를 위해 꼭 얻어야할 세 사람은 아무도 한왕 곁에 없었다. 애초부터 남의 사람이었던 경포나 위(魏)나라 상국(相國)으로 삼아 따로 보낸 팽월은 말할 것도 없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장군으로 부리고 있던 한신마저 그 종적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신이나 팽월은 이미 품안에 든 사람들이라 이번 고비만 넘기면 어떻게 찾아 다시 쓸 수나 있지만, 경포를 끌어들일 일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군막을 드나들며 손님을 응대하는 일을 맡아오던 알자(謁者) 수하(隨何)가 나서 정색을 하고 한왕의 말을 받았다.

“대왕께서 어인 말씀이신지요? 신은 도무지 대왕께서 그리 말씀하신 뜻을 모르겠습니다.”

역이기나 주가와 기신 같은 유가(儒家)의 무리로 언제나 소심하고 예절바른 수하였으나, 그날 한왕을 바라보는 눈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강렬했다. 그래도 한왕은 별 기대 없이 수하의 말을 받았다.

“누가 능히 나를 위해 구강(九江)에 사자로 갈 수 있겠는가. 가서 그 왕 영포(英布)를 달래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배신케 할 수 있겠는가! 항왕을 몇 달 동안만 그 땅에 잡아둔다면 내가 천하를 얻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하가 결연한 목소리로 받았다.

“삼가 신이 대왕의 뜻을 받들어 보겠습니다. 신을 그리로 보내 주십시오.”

“그대가? 이것은 손님을 예절바르게 맞아들이고 규모 있게 접대하는 일과는 다른 일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가 해낼 수 있겠는가?”

“대왕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신은 영포와 같이 육(六=六縣)땅 사람입니다.”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서 모두 한편으로 달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영포를 알고 있는가?”

그래도 미덥지 않다는 듯 한왕이 다시 수하에게 이죽거리듯 물었다. 수하가 여전히 정색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압니다. 신은 어렸을 적부터 그의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육은 순(舜)임금의 대신으로 형률(刑律)을 맡았던 고요(皐陶)의 땅이다. 그런데 영포는 그 형률에 걸려 얼굴에 자자(刺字)를 받은 것을 자랑삼으며 이름마저 경포(경布)로 바꾼 흉측한 무리다. 또 항왕의 말 한마디에 의제(義帝)를 시해하여 강물에 던진 탐욕스럽고도 잔인한 자다. 그런 자를 그대 같은 유자가 어떻게 달랠 수 있는가?”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천하의 일로 그런 영포를 불러 쓰시려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도 천하의 일을 들어 그를 한번 달래 보겠습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