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관심을 끄는 말이 ‘실용’이다.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의 낙마에 따른 문책에서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의 잔류는 실용노선의 인정이 아니냐는 점이 거론되면서부터 특히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이 나왔고 대통령은 ‘노선 문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면서도 ‘국민이 나를 약간 개혁 쪽으로 치우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비서실장은 조금 덜 치우친 사람이 좋지 않겠나’라고 묘한 말을 덧붙였다. 대통령은 ‘치우치지 않는 국정이 좋지 않겠나’라고도 했다. 대통령이 정색하고 실용노선을 부인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묵시적 동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치우치지 않는 국정’이란 말은 나름대로 풀이의 근거가 된다.
‘실용노선’이란 무엇이겠는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결과의 효율성을 중시하자는 것 아닌가. 공허한 담론이 아니라 백성의 일상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하자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방법론은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 아니겠는가.
▼번지는 ‘강온싸움’▼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노선투쟁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대화와 협상에 얼마나 무게를 두느냐는 방법론의 싸움이라고 본다. 결국 밀어붙이느냐, 합의를 이끌어내려 하느냐의 ‘강온싸움’인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한마디로 개혁 문제를 놓고 우선순위와 속도에서 혁명적 직진형이냐, 아니냐의 논쟁 아닌가. 이런저런 모임과 계파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기저(基底)는 강온의 차이다. 한나라당에서 벌어지는 것도 개혁적 리더십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란이지만, 동시에 강온싸움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대화와 협상을 앞세우는 온건노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집권세력의 경우, 혁명적 분위기가 휩쓸던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다. 그렇다면 왜 온건노선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가. 현 정권의 궤적을 되돌아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개혁 독점욕에서 빚어진 ‘개혁 밀어붙이기’가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온건노선의 기조다. 그래서 방법과 시기를 달리하자는 것 아닌가. 실제로 심각한 민생 문제는 제쳐두고 개혁에만 매달리다 결국 돌아온 것이 민심 이반과 낮은 지지도 아닌가. 여기서 실용과 온건노선은 궤를 같이한다.
권력을 쥐고 나면 편한 것이 많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정치 구호의 선점 효과다. 게다가 현 정권은 유난히도 정치적 구호를 ‘개혁’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속칭 신문법, 사학법, 친일진상규명법, 국가보안법을 묶어서 ‘4대 개혁입법’이라고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선창에 덩달아 ‘개혁입법’이라고 따랐다. 그런데 당장 신문법은 위헌요소가 있어 헌법재판소에 제소될 공산이 크다. 위헌 여부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일부 집권세력은 개혁 구호에 짓눌려 있다는 증거다. 괜히 힘이 들어가고 감당 못할 개혁이라면, 이참에 차라리 ‘개선’으로 바꿔라. 세상을 뒤집어엎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겠다면 ‘개선’이 옳다. 개혁의 주술에서 벗어나 개혁 거품을 빼란 말이다. 공허한 개혁 구호에 민심은 이미 지쳤다는 것도 실용노선이 힘을 얻는 이유다.
▼分家아닌 ‘齊家’ 경쟁을▼
앞길이 험난하고 위태롭기는 하지만, 우리당의 ‘선진사회’에 이어 한나라당의 ‘정쟁 없는 해’ 선언을 보면 실용노선의 생존 가능성이 비관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국민을 보는 눈이다. 현 정권 들어서 조성된 나쁜 풍조가 국민을 보는 사시(斜視) 현상이다. ‘편 가르기’가 굳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나누기’ 식이다. 민심과 국력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왜 나누기인가. 정권 연장과 쟁취에 목을 맨 정파들에게 미용체조 하듯이 우아하게 싸움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민심과 국력을 나누는 분가(分家) 싸움이 아니라, 합해서 끌고 가는 제가(齊家) 경쟁을 하라. 실용노선이 따로 있지 않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