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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은 色이다]검은섬 흑산도의 고매한 정신

입력 | 2005-01-20 15:38:00


최근 흑산도에 다녀왔다. 새 학기를 앞두고 일의 계획도 짜고 구상 중인 책에 담을 사진도 찍을 겸 나선 길이었다.

목포에서 뱃길로 90여km. 동백나무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가 우거져 멀리서 바라보면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흑산(黑山)이다.

유사 이래 멀고 험한 땅은 유배지로 적격이다. 영·정조시대 비운의 실학자 손암 정약전이 이곳에 유배돼 ‘자산어보’를 집필했고, 구한말 치열한 저항정신으로 구국을 실천한 면암 최익현 역시 유배된 곳이다. 그들 선각자의 마음은 이곳에서 더욱 검게 타들어갔을 터인즉, 겨울 흑산도는 방문객을 차분하게 만드는 위력이 있다.

모든 색을 흡수하면 검게 보인다. 물체는 빛을 반사해 색을 나타내는데, 반사율보다 흡수율이 높을수록 검정에 가까워진다.

검정은 현묘(玄妙)한 색이다. 천자문 첫머리에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했다. 하늘이 검다는 말은 깊다는 뜻으로, 깊은 바다 또한 검게 보인다.

검정은 고급스러운 색이다. 그래서 검정 자동차는 한껏 권위를 자랑한다. 검정은 색보다 형태를 돋보이게 한다. 20대 젊은이들에게 검정 패션이 잘 어울리는 것은 멋진 얼굴과 싱싱한 피부를 더욱 강조해주기 때문이다. 검정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열정을 곧잘 중화시켜 준다.

검정은 신뢰를 주는 색이다. 하얀 종이에 인쇄된 검정 글씨는 다른 어떤 색보다 내용에 무게를 더한다. 서예가나 한국화가가 구사하는 먹빛은 창조의 출발점이다. 검정 먹물은 고매한 정신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훌륭한 색이다. 색의 군더더기를 생략한 흑백 영화는 내용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검정 만년필, 검정 구두, 검정 카메라는 한결같이 성능이 우수한 고급품이란 느낌을 준다.

이별을 할 때 검정 옷은 진심 어린 거절의 마음을 전한다. 검정은 극기심을 높이고 스스로의 설득력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받고 싶을 때,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잠시라도 멀어지고 싶을 때, 검정은 동요하는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캄캄한 어둠, 멀고도 조용한 곳, 문득 정신이 되살아나는 그곳에는 심오한 검정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일상의 굴레에 갇혀 삶의 초점을 놓치고 있다면 혼자라도 좋으니 멀리 떠나보시라. 어찌 알겠는가. 검정의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게 될는지.

성기혁 경복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khsung@kyungb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