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한 시민이 이날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문세광 사건 관련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정부가 한일 관계와 관련된 외교문서를 잇달아 공개하고 나서자 정치권 일각에서 그 배경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17일과 20일 각각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 5건과 문세광 사건 관련 문서들은 모두 박 전 대통령의 딸인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에게 정치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또 한일협정 문서에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전혀 하지 않은 점은 대일(對日) 협상 중인 북한에 유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가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들이려는 남측의 ‘당근’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더구나 외교통상부는 한일협정 문서의 경우 이번에 공개된 5건 이외에 나머지 150여 건도 8월 15일 이전에 대부분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 다걸기(올인)’를 선언한 직후 정부가 잇따라 과거사 문서를 공개하는 데 대해 다른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2월 임시국회에서 과거사진상규명법이 초미의 쟁점으로 걸려 있는 상황에서 다시 국면을 여당에 유리하게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외교부는 “12년째 해 온 통상적인 행정조치”라고 일축하고 있다. 외무부령으로 ‘외교문서 보존 및 공개에 관한 규칙’이 제정된 것은 1993년. 정부는 1994년 이후 지난해 1월까지 5912권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외교부 내 외교문서공개심의회는 매년 12월 작성된 지 30년이 지난 문서 중 공개 문서를 확정하고, 다음해 1월 이를 공개해 왔다. 이번 문서 공개도 정치 일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한일 관계 문서가 주로 공개된 데 대해서도 정부 관계자는 “대상 문서 1200여 건 중 91%를 공개했다”며 취사선택한 것은 아님을 강조했다. 한일협정 문서는 1960년대 작성돼 1990년대에 이미 공개돼야 했으나 미루다가 지난해 2월 서울행정법원의 공개결정 판결 때문에 공개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도 ‘정치적 고려’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닌 듯한 흔적이 감지된다. 청와대와 여권이 문서 공개 직후 ‘과거 정부가 잘못했지만 우리가 정리하고 치유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번 문서 공개를 활용할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한일 관계 전문가는 “법과 규정에 따른 문서 공개라고 해도 결과적으론 참여정부의 과거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며 “설사 정치적 동기가 없었다 하더라도 정치적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호원 기자 bestig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