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에 다녀왔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일할 곳을 찾아 나라 밖으로 나가는 청년들이 급증한다는 말도 들었다. 속상한 마음에 외국행을 택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나는 스무 해 전 미국으로 건너와 새 삶을 시작했다. 나라 밖으로 나가 일할 각오를 굳혀가는 우리 청년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한국에서 나는 공대를 졸업한 뒤 100군데가 넘는 기업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어떤 곳은 ‘여자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명시해 답장을 보내오기도 했다. 박사 과정을 밟으며 겨우 취직하자 기뻐 어쩔 줄 몰랐지만 당시 내 일 중에는 ‘재떨이 비우는 일’도 들어 있었다.
미국에서의 성공도 쉽지 않았다. 공장의 생산라인을 감독하고 나름대로 훌륭한 성과도 거뒀지만 7년이 지나도 승진이 안됐다. 주변에서 ‘미국 학교를 나오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밤에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다녔지만 그래도 승진이 안됐다.
화가 난 나에게 한때 내가 다녔던 직장의 부사장이 말했다. “아무도 네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 대화가 안됐으니까. 너한테 필요한 건 학위를 따는 게 아냐. 미국인과 잘 대화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간부들의 뜻을 파악하는 거야.”
그건 나도 느끼던 것이지만 주변에서 그처럼 분명히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MBA 과정을 중단하고 영어 스피치 클럽에 들어갔다. 미국인이 한 번 들으면 되는 코스를 세 번, 네 번 들었다. 영어로 또박또박 말하며 끈기 있고 기분 좋게 설명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온 힘을 다했다. 영어로 리더십 개발하는 세미나도 들었고, 세일즈 일을 할 것도 아니면서 미국 세일즈맨과 경쟁하는 코스도 들었다. 미국에선 내가 ‘상품’이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기업 일을 하면서 ‘라이노 비즈니스 클럽’이라는 스피치 클럽을 만들었다. 한국인이 하는 클럽이라 조바심도 있었지만 그간 500명이 넘는 미국 젊은이들이 거쳐 갔다. 금융인 변호사 외교관도 있었다. 상무부의 한 관리는 ‘미국 최고의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는 2001년 7월 10일을 내 이름을 따서 ‘진수 테리의 날’로 정했다. 나는 지난해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나를 제외하면 모든 경영진이 백인이다.
낙담과 분노를 거친 뒤 내가 깨달은 것은 ‘나의 성공을 방해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 출발하는 청년들도 성공할 수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건 최선을 다하는 이에게 성공은 반드시 찾아온다.
▼약력▼
1956년 생으로 숙명여대 의류학과 박사 과정 이수 중 도미했다. 2003년 미국 상무부 차관이 수여하는 ‘소수민족을 위한 국제무역 공로상’을 받았다.
진수 테리 미국 의류회사 ‘컷루스’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