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펑펑 눈이 내리던 날, 엽서 한 장이 제 우편함에 도착했습니다. 미국 샌타클래라에서 선생님이 보내주신 엽서예요. 누군가 손으로 눌러쓴 서신을 읽는 것은 얼마나 드물고 또 반가운 일인지요. ‘묵은 나무냄새가 나는’ 연구실에서 한 자 한 자 엽서를 채우셨을 선생님 모습을 생각하니 제 마음도 따뜻하고 환해지는 듯했습니다.
엽서 뒷면에 인쇄된 그곳의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선생님이 가 계신 그곳 샌타클래라는 참으로 고즈넉하고 평온한 공간이군요. 문득 저도 어디든, 정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집니다. ‘엽서’라는 시에서, 황동규 시인은 노래했지요. ‘…그 설경 속에 모든 것은 지금 말이 없다. 너는 알리라, 떠날 때보다는 내 얼마나 즐겁게 돌아왔는가. 외로운 것보다는 얼마나 힘차게 힘차게 돌아왔는가.’
떠날 때보다 즐겁게 돌아오는 여행이란, 선생님,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떠나서보다 오히려 떠나기 전, 떠날 계획을 세우던 설렘의 순간이 저에겐 늘 그 여행의 클라이맥스로 기억되어요. 어린 시절 읽던 아동문고 전집에는 반드시 여러 권의 ‘여행서사’가 끼어 있었지요.
걸리버 여행기, 톰 소여의 모험, 15소년 표류기 같은 그 많은 ‘길 위의’ 이야기들. 해가 짧은 겨울방학의 오후, 방바닥에 배를 깔고 나른히 엎드린 채로 그들이 집을 떠나 맞닥뜨리는 놀라운 세계에 매혹되곤 했어요. 그들이 겪는 갖은 어려움과 고난은 불안하거나 불길해 보였지만, 그래서 손에 땀이 나도록 조마조마했지만, 동시에 저에게 기묘한 안도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저 모든 모험과 방랑을 무사히 마치고 ‘새 사람’이 되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테니까요. 귀환의 결말이야말로 여행서사의 관습이라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된 듯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겁이 많은 아이였나 봐요. 그들을 따라 길을 떠나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될까봐 내심 두려웠습니다. 낯선 곳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나’를 대면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데 대해 근원적 공포를 느낀 건 아닐까, 이제야 짐작해 봅니다.
망명이나 죽음이 아닌 이상 모든 여행은 현실로의 귀환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돌아올 때의 ‘나’는 떠날 때의 ‘나’와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처음 읽었던 스무 살, 뒤통수가 얼얼해질 만큼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여행이 품은 비밀에 대하여 이만큼 예리하게 드러낸 문장을 그 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여행이 생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면, 우리가 사는 생의 시간 자체가 길고 먼 여행의 시간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여행자이거나 난민(難民)인 셈입니다.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이국에 머무는 시인 허수경의 탄식이 지그시 이마에 닿는 아침입니다.
정이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