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씨네리뷰]스크린 ‘과거사’가 휩쓴다

입력 | 2005-01-24 16:09:00


해외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2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알렉산더’. 최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그때 그 사람들’(2월 3일 개봉). 두 편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역사 혹은 과거를 다룬 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로 능히 꼽힐 만한 알렉산더와 한국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던 10·26사태의 현장.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대중은 관심을 갖는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이건,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이건 평가 자체는 차후의 문제다. 우선은 그 순간을 ‘목격’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산업이자 예술인 영화는 대중의 뜨거운 시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2004년 한국의 영화 관객은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 형’ ‘바람의 파이터’ 등 유난히 과거를 다룬 영화들에 시선을 돌렸다. 흥행에 실패했지만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역도산’ 등도 한국 현대사의 한 순간을 그린 영화였다. 현실이 힘든 탓일까. 유난히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리는 복고풍이 유행했다. 올해도 실화를 다룬 영화로는 ‘그때 그 사람들’과 최초의 여성 비행사를 그린 ‘청연’이 있고, 가상의 사건이 펼쳐지지만 과거의 시공간이 펼쳐지는 ‘혈의 누’ ‘천군’ ‘형사’ ‘웰컴 투 동막골’ 등이 한창 촬영 중이다.

2003년 말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역사영화, 복고영화는 어떤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물적인 조건으로는 과거의 풍경을 재현한 거대한 세트를 만들어낼 기반이 생겨났다는 점이 있다. 잠깐 화면에 잡히는 골목길이나 좁은 실내가 아니라 ‘YMCA 야구단’이나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복잡한 근대의 거리 풍경, 6·25전쟁을 고스란히 화면에 담기 위해서는 막대한 제작비가 필요하다. 세트와 디지털 특수효과를 통해 우리가 상상하는 과거의 풍경이 현실로 재현된다. ‘반지의 전쟁’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 과거의 재현 역시 일종의 판타지인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현대적으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감독의 시각이 중요하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은 그 시절의 기억이 일종의 집단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지난한 현대사의 풍경. 그것이 ‘하류인생’과 ‘효자동 이발사’ 등의 영화에 들어가 있다. 이 추레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현대사의 순간들은 ‘하류인생’처럼 감독의 인생 자체와 겹쳐진다.

에비에이터

지금 한국영화계의 주역인 프로듀서와 감독은 이른바 386세대가 많고, 고통스러웠던 성장의 기억을 영화로 되살리고 있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 시절이 과연 어떤 시대였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영화라는 매체 안에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복고풍 영화의 시공간이 유난히 현대사에 집중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삶과 세계를, 영화를 통해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미국 할리우드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에비에이터’(2월 18일 개봉)는 20세기 초의 재벌이자 영화제작자, 비행사였던 기인 하워드 휴즈의 삶을 그린 영화다. 제이미 폭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레이’(2월 18일 개봉)는 맹인 가수 레이 찰스의 전기영화다. 올여름에 기대할 대작으로는 ‘글래디에이터’의 리들리 스콧 감독이 십자군전쟁을 다룬 ‘킹덤 오브 헤븐’이 있다. 할리우드의 전기영화는 트렌드라기보다는 하나의 장르처럼 일반화된 경향이다. ‘에비에이터’와 ‘레이’의 공통점은 실제 인물의 전기라는 것뿐이다. 반면 ‘킹덤 오브 헤븐’은 역사를 하나의 스펙터클로 재현함으로써 충실한 재현 자체가 하나의 이슈가 되는 21세기 서사극의 전형적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매트릭스’와 ‘반지의 제왕’으로 시작된 21세기의 할리우드 영화는 언제나처럼 가상의 리얼리즘에 도전하고 있다. 디지털 특수효과는 오히려 리얼리티의 재현을 부추긴다. 그것은 충무로에서 역사를 다룬 영화가 연이어 만들어지는 이유와 통한다. 역사영화는 결국 재현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환영에서, 역사와 현실이라는 리얼리티를 찾아 헤매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아닐까.

김봉석 영화평론가

▼배트맨-스타워즈 과거의 모습은?▼

‘과거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전편의 과거 이야기를 헤집고 들어가는 ‘전편 같은 속편’ 영화, 즉 ‘프리퀄(Prequel)’이 속출하는 것.

전편의 다음 이야기를 다루는 시퀄(Sequel)의 상대 개념인 프리퀄은 지난해 국내 개봉한 SF 호러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에서 이미 나타났다. ‘엑소시스트’의 4번째 시리즈인 이 영화는 1973년 첫선을 보인 원작의 25년 전으로 돌아가 젊은 메린 신부가 퇴마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할리우드의 이런 프리퀄 열풍의 원조 격인 영화는 1999년 나온 ‘스타워즈’의 네 번째 시리즈 ‘스타워즈-에피소드 1’. ‘스타워즈 에피소드’ 3부작 중 첫 편인 이 영화는 1977∼87년 제작된 ‘스타워즈’ 3부작에서 활약한 주인공들의 부모 세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최근 개봉했거나 개봉을 앞둔 할리우드 영화 중에는 기대되는 프리퀄이 적지 않다. 우선 5월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시스의 복수’. ‘스타워즈 에피소드’ 3부작의 완결 편인 이 영화는 포스의 어두운 힘에 끌려 제다이의 영웅이었던 아나킨이 다스베이더가 되는 과정을 담는다.

또 ‘배트맨’의 6번째 시리즈로 한국에서 8월경 개봉 예정인 ‘배트맨 비긴스’는 콤플렉스 덩어리인 배트맨의 탄생으로 돌아가 그가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얽힌 비밀을 밝힌다. 어린 시절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웨인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동양으로 떠났지만 닌자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은 뒤 돌아와 배트맨이 된다. ‘이퀼리브리엄’에 출연했던 크리스천 베일이 4대 배트맨을 맡았으며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했다.

21일 국내 개봉된 캐나다 영화 ‘큐브 제로’도 마찬가지. 1997년 만들어진 원작(‘큐브’)의 프리퀄인 이 영화는 정육면체 방들이 연속된 폐쇄 공간에서 도망치려 할수록 더 잔혹하게 죽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은 ‘큐브’의 기원과 정체를 밝혀주는 완결 편. 죽음의 미로에 갇힌 6명의 이전 이야기로 돌아가 큐브를 감시하는 자와 그 배후를 공개한다.

프리퀄의 잇따른 출현은 이야기를 이어나갈 만한 소재가 고갈되자 뻔한 속편에 지친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색다른 변주’로 시작됐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리즈 전체를 하나의 큰 내러티브로 볼 때 내러티브를 비틀고 좀 더 자유롭게 구성하는 현대적인 흐름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는 “세계 질서나 역사 흐름이 단선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에 따라 시간 순서로 이어가는 과거 모더니즘적 내러티브 전개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리퀄’은 이런 현상 중 하나”라며 “이는 최근 영화 연구의 대상이 영화의 출현 직후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