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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감동 42.195km, 아름답고 위대한 ‘말아톤’

입력 | 2005-01-26 17:21:00

사진 제공 시네라인Ⅱ


자폐아의 인간승리를 담은 영화 ‘말아톤’은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내던 작지만 소중한 감각을 섬세하게 일깨운다. 그 감각은, 바로 촉각이다. 이 영화는 간질인다. 손끝을 스쳐 가는 들풀, 손바닥에 전해지는 심장박동, 눈가를 스치는 바람, 이마를 때리는 빗방울…. 이런 것들이 새삼스럽게 아름답고 따스하고 위대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게 이 영화의 힘이고 이 영화가 갖는 감동의 뿌리다. 이런 촉감은 자폐아 초원이의 말처럼 우리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만든다. 이 영화는 웃기고, 웃기는 이유로 재밌고, 재밌는 이유로 슬프고, 슬픈 이유로 감동적이다.

얼룩말과 초코파이에 집착하는 자폐아 초원(조승우·사진)이는 스무 살 청년이 되었지만 지능은 다섯 살이다. 엄마 경숙(김미숙)은 달리기에 재능을 보이는 초원이를 훈련해 ‘서브스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내에 완주하는 것)를 달성하려 한다. 어느 날 초원이가 다니는 특수학교에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왕년의 유명 마라토너 정욱(이기영)이 온다. 경숙은 정욱에게 아들의 코치 역할을 떠맡긴다. 세상사에 부정적이던 정욱은 초원이에게 점차 마음을 연다.

관객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고 맺어질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내용과 설정은 진부하다. 그러나 ‘말아톤’은 이 진부함의 요소들을 차곡차곡 재조합해 강력한 울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조승우 때문이다. 조승우는 “안 쓰러져요. 초원이, 안 쓰러져” 같은 평면적인 대사들의 단어 하나하나를 분리해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발음함으로써 아주 입체적이고 특별한 느낌을 낸다. 그는 자폐아를 따라하려 하기보단 그 자신을 자폐아로 창조했다.

“초원이 다리는?”(엄마) “100만 불짜리 다리.”(초원) “초원이 몸매는?”(엄마) “끝내 줘요.”(초원)

이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반복’이다. 모자간 나누는 이 대사는 수 차례 반복되는데, 똑같은 대사가 반복될 때마다 처음엔 웃기고 다음엔 울리고 마지막엔 깨달음을 만든다. 이는 비슷한 대사와 행위를, 달라지고 더 깊어진 상황 속에 각기 묻어둠으로써 관객이 능동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세련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초원이가 집착하는 두 개의 대상인 초코파이와 얼룩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초코파이와 얼룩말은 초원이가 죽고 못 사는 대상이자, 초원이를 곤경에 빠뜨리는 대상이며, 결국 초원이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들에게서 독립해 가는 과정을 통해 초원이는 세상과 소통하게 되고, 엄마와 코치는 비로소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 된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요” 같은 아주 평범한 말도 진저리쳐질 정도로 특별하게 와 닿는다. 이런 몇 개의 대사와 단어들은 반복되는 동안 관객을 감정의 무장해제 상태로 몰아간다. 자신이 웃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울게 되는 야릇한 경험…. 이 영화는 마치 초원이가 마라톤 풀코스 길이를 숫자로 ‘4.2.1.9.5’ 또박또박 왼 팔뚝에 쓸 때의 심정으로, 서두르거나 강요하지 않고 감정의 보따리를 푼다. 그리고 이 영화와 함께 ‘4.2.1.9.5 킬로미터’를 지난하게 뛰어온 관객이 맞닥뜨리는 것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초원이(혹은 인간 조승우)의 표정, ‘스마일!’이다.

23년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김미숙도 우아함을 버린 대신 부드러움을 접붙인 굳센 이미지로, ‘우리 형’ 등에서 김해숙이 구축한 모질고 강한 어머니상과는 다른 독특한 포지션을 만들었다. 제목인 ‘말아톤’은 초원이가 자신의 그림일기장 ‘내일 할 일’ 난에 쓴 단어를 그대로 가져온 말. 정윤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 27일 개봉. 전체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