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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뷰]‘그때 그 사람들’ 통쾌한 해학인가 모멸감인가

입력 | 2005-01-26 17:43:00


‘그때 그 사람들’은 이처럼 영화 ‘바깥’에 요란하게 좌판을 벌임으로써 “영화를 영화로만 보아 달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사뭇 배반하는 마케팅 전술을 구사했다. 미리 본 영화에서도 ‘의도’와 ‘표현’ 사이의 어긋남은 반복됐다.

○ 쓰레기와 웃음거리

“누구라도 죽으면 다 냄새 피우는 쓰레기인 거요.” 대통령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중앙정보부장(백윤식)이 던지는 말이다.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임상수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통해 힘주어 말하고자 했던 바는 “한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커다란 우주이며 그 점에서는 대통령이든 이름 없는 경호원이든 다르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시신이 국무위원들에게 공개되는 장면은 ‘인간 존엄’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벌거벗은 대통령의 시신, 시신의 성기 부분에 군모를 얹는 장군, 시신 앞에 “각하”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흐느끼는 늙은 각료들의 모습을 통해 ‘절대자’의 죽음은 쓰레기처럼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추한 웃음거리가 된다.

○ 픽션과 사실 사이

‘그때 그 사람들’의 도입부는 1979년 부마항쟁 시위 장면, 마지막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을 담은 기록화면으로 처리됐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다룬다. 그만큼 영화의 맥락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10·26사태와 그 전후 사건, 실존인물들에 대한 ‘현대사 선행학습’이 전제된다.

가상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해도 정치적 폭압, 인간 존재의 귀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픽션의 힘.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은 사실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발목을 묶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왜 다큐멘터리로 만들지 않고 굳이 픽션인 영화로 만들어야 했을까를 반문하게 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역의 백윤식, 채홍사 노릇에 넌더리를 내는 주 과장 역의 한석규, 길을 잘못 든 부관 민 대령 역의 김응수 등 출연진의 고른 연기, 그리고 세련된 촬영과 미술이 오히려 영화의 극적 구성에 비해 차고 넘친다.

○ 각성과 모멸의 차이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영화 속에서 궁정동 만찬에 불려갔다가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 가짜 여대생 호스티스(조은지)가 눈물을 닦아내며 뱉는 대사다.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듣고 모여 앉은 국무위원들은 사과를 깎거나 혈압을 재고 헌법 어디에 권한대행에 대한 규정이 있는지 장기 훈수 두듯 한가하게 시비를 벌인다.

임 감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팩트는 껍데기일 뿐이고, 매 순간 살아있는 디테일은 내 상상”이라고 말했다. 그 상상은 주로 시대나 권력에 대한 ‘조롱’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조롱’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영화가 다룬 현대사에 대한 각성이나 통쾌한 해학이 아니라 역사와 우리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 “대한민국 만세 좋아하시네, 아이고 철딱서니 없기는”이라는 내레이션이 압축하듯….

‘그때 그 사람들’은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 측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재판부 결정을 앞두고 있다. 와중에 이 영화의 투자 일부와 배급을 맡기로 했던 CJ엔터테인먼트 측은 영화배급을 포기하고 전체 제작비의 20%선이던 투자금 10억 원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상영이 금지된다 해도 ‘그때 그 사람들’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닌 ‘희생자’ 이미지를 통해 또 한번 후광효과를 누리게 될지 모른다. 2월 3일 개봉 예정. 15세 이상 관람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