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직원들과 북한산에서 새해 아침을 맞은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가운데). 새로운 도전이 시작될 때마다 그는 산행으로 마음을 다졌다. 사진 제공 삼성석유화학
2005년 새해 첫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벽 5시 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북한산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함께 산을 오르기로 한 일행들이 집합 장소에 모이자 누군가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시간은 만물도 깨어 있지 않는 시간입니다. 우리만이 깨어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먼저 잠에서 깨어나 생각하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꽁꽁 얼어붙은 산길을 헤치고 모두가 정상에 오른다. 몇 평 되지 않는 좁은 산꼭대기에서 일행 모두가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며 ‘선구자’를 부른다. 이어서 손에 손을 잡고 ‘만세삼창’이 이어진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고요 속의 외침이다. 이들 일행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이다.
등산은 사람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여가 활동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그의 산행은 좀 독특하다. 경건한 의식처럼 보이는 이 만세삼창을 겸한 다짐은 새해 첫날의 산행에서뿐 아니다. 그는 언제 어디든 산에 오르기에 앞서, 그리고 산의 가장 높은 부분에 올라서 스스로 각오를 되새긴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흐른 땀을 씻으러 간다. 산행에서 힘들었던 순간, 정상에서 뭉클하게 서로 나누었던 마음을 나누며 목욕탕 안의 따뜻한 훈기로 피로와 긴장을 모두 풀어준다. 시내의 헬스장이나 골프 뒤 목욕과는 다른 이 훈훈함이야말로 그가 산행 2단계에서 꼭 만끽하는 즐거움이다.
그리고는 근처 식당에서 조촐하게 식사와 술 한잔을 나눈다. 산행 길에서 일행들과 나누었던 기분과 정결하게 몸을 닦은 상쾌함이 어우러져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된다.
이렇게 그는 13년째 새해 첫날을 산에서 맞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를 격려하며 정상을 향해 내딛는 걸음에서 깊은 인정과 믿음을 느낀다.
그의 산행은 규칙적이다. 새해 첫날을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지방 공장과 서울 사무실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 이루어진다. 조금의 짬이라도 생기면 그는 어김없이 산을 찾는다. 특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이나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을 때는 모든 일을 제치고 반드시 산으로 향한다.
물론 다른 최고경영자(CEO)들처럼 골프도 즐긴다. 하지만 골프와 등산을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등산을 택한다. 골프는 최대 4인이라는 제한된 인원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게임규칙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등산은 다르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산을 오르내리며 흘리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육즙’을 매개로 따뜻한 온정을 나누고 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산이라도 계절 따라 다르고, ‘산 동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까운 관악산, 도봉산, 북한산은 물론 한라산, 지리산, 내장산 등 전국의 산을 몇 번이고 찾는다. 그러나 아무리 산이 좋아도 결코 혼자 오르는 법은 없다. 게다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 산을 오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때문에 그는 해외 명산을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는다.
그는 또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산에 오른다. 첫째, 산길이 너무 순탄한 것보다는 바위가 중간 중간 길을 막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을 오르고자 하는 도전 욕구가 강해진다. 둘째, 산 근처에 산행 이후 피로를 풀 수 있는 ‘보조수단’이 있어야 한다. 산에서 내려와 한데 어우러져서 씻고 마시는 유쾌한 분위기가 있어야 함께한 보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등산에서 돌아온 후에는 바로 ‘그 때’의 추억 감동 즐거움이 순간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산행일기’를 남긴다. 차곡차곡 적어 담은 기록만도 벌써 수백 장 분량이다.
새로운 시작과 도전이 있을 때마다 함께하는 산. 그에게 산은 휴식과 충전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도전과 열정 그 자체이다. 또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의 기록을 일구어 낸 성과창조의 핵이기도 하다.
홍종희 웰빙소사이어티 대표 lizhong@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