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작가, 서울은 몹시 춥다지요? 내가 머무르는 북캘리포니아도 이름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나직한 구름과 이따금씩 찔끔거리는 빗방울이 음산함을 더해줄 뿐 얼음과 눈이라는 겨울 본색은 찾아볼 수 없군요. 흔히 ‘미국’이라는 나라는 있지만 그런 이름의 땅은 없다고 합니다. 50개 주마다 제각기 다른 자연조건과 생활규범으로 살아가지요.
이 나라의 국호인 ‘아메리카합중국’이란 단어가 등장할 때는 뭔가 세상에 큰일이 벌어집니다. 요즘이 그런 것 같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재선한 아메리카인은 국제사회에서 명분도 인기도 없는 이라크전쟁이지만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21분짜리 취임연설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마흔아홉 차례나 되풀이하면서 지구상에 ‘전제정치’를 종식시키는 미국인의 임무를 강조했습니다. 마치 21세기판 십자군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입니다.
전통적으로 미국 문학의 영웅은 집을 떠나 여행에 나서지요. 정복과 개척을 통해 강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인의 이상이자 미덕입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조차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노인은 정말이지 외롭지요.
마지막 정복지, 그래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이곳 캘리포니아 주의 지사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근육질 영화배우입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그의 무식한 표정과 위압적인 힘에서 바로 미국의 본질을 봅니다. 미국 헌법은 외국 태생의 인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헌법개정 운동을 벌이는 ‘아사모’도 있습니다.
정 작가의 느낌으로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이곳도 한때는 치열한 피와 이념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인디언, 스페인, 멕시코를 차례차례 총칼로 누르고서도 한참이나 내부 갈등을 겪었지요. 잭 런던의 ‘강철군화’(1908년)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년)의 산지가 바로 이곳입니다.
지난 주말에 듬성하고 느린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나갔지요. 치열한 삶에서 은퇴한 유럽 출신 노부부를 찾았습니다. 금문교와 태평양이 함께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 ‘진주귀고리소녀’ 그림을 만났지요. 머리칼을 내보이고선 순결을 잃은 당혹감에 무지랭이 청년의 품으로 내쳐 달려가던 그리트의 가쁜 숨결이 되살아났습니다. 주인 화가와 모델 하녀 사이가 ‘모종의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던 정 작가의 영화평도 떠올랐고요.
정이현 작가, 떠난 지 한 달도 채 못 되었지만 벌써 고국이 그립습니다. 마치 이등병 제대 날짜 세듯이 벌써 돌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류시화의 시구(詩句)대로 곁에 두고서도 그리운 사람이 있듯이, 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고향이나 고국은 떠나서 이따금씩 찾는 곳이 아니라 언제나 가슴에 지니고 다니는 곳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미국인이 못되나 봅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로스쿨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