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강혜진 씨(24·여·서울 강남구 개포동)는 지하철에 타면 빈자리가 있어도 먼저 주변을 힐끔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지난해 12월 출근길에 빈자리로 향하던 중 한 아주머니가 손가방을 그 자리에 던지며 자신을 밀쳐내는 바람에 넘어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 그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빨리 앉는 사람이 임자’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아주머니를 보자 아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서울지하철은 노선거리 286km, 연간 수송인원 22억 명으로 외형상 세계적인 수준이다. 처음 개통된 1974년에 비해 운행 횟수는 15배, 하루 수송 인원은 50배가량 늘어났다. 부산 인천 대구 광주 등 다른 지역에서도 지하철은 점차 주요 교통수단이 돼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에티켓은 ‘지하철 강국’의 면모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에서 한국 거주 외국인들을 상대로 ‘생활 전반에서 개선이 필요한 점’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의 공중 에티켓을 지적한 응답이 전체의 3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옆 칸으로 이동하는 것은 좋은데 문을 열어놓고 가면 노약자들이 찬바람을 쐬게 되잖아요.”
“닫히는 출입문을 열려고 손까지 끼워 넣습니다. 2, 3분 빨리 가려고 수백 명의 시간을 빼앗는 사람들이 선진시민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실종된 지하철 에티켓에 관한 시민들의 항의전화도 서울지하철공사 민원실에 하루 평균 10∼15통 걸려오고 있다.
이에 따라 공사 측은 지난해 3월 ‘신문 접어보기’ ‘한 좌석에 7명씩 앉기’ 등을 내용으로 한 에티켓 홍보물을 배포한 데 이어 최근 ‘지하철 내 10대 예절 권고사항’을 선정했다.
그러나 ‘꼴불견’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있다.
지하철 공익근무요원 김모 씨(23)는 “화재나 위기상황에 대비해 설치해 놓은 비상조명등을 훔쳐가는 사람이 많다”며 “지난달부터 조명등을 건드리면 경보음이 울리도록 했지만 요즘에도 하루 4, 5개씩 없어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익근무요원은 “술 취한 사람들이 승강장 내에서 대소변을 보는 경우도 많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를 아예 세우고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람들은 제지를 받아도 “바쁜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도리어 화를 낸다는 것.
특히 아주머니들이 초등학생들에게 학생용 승차권을 사달라고 시키는 경우, 장애인증을 가짜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경우 등은 에티켓 차원을 넘어 경범죄에 해당하는 사례다.
온라인상에도 누리꾼(네티즌)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한 누리꾼은 최근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휴대전화가 울리면 빨리 받지 않고 음악 감상을 하듯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받아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도 있다’고 지적했다.
지하철 예절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한정된 공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 특히 함께 타고 가는 동료의 수가 많을수록 만용을 부리며 ‘민폐’를 끼친다.
여운걸 HMI서비스연구소 소장은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대끼는’ 삶을 살다보니 타인에 대한 공간적 배려가 부족하다”며 “월드컵이 끝난 뒤 소홀해진 에티켓에 대한 홍보와 관심을 넓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이 기사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황성규 씨(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년)와 이상엽 씨(연세대 의대 본과 3년)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