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핫팬츠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등장한 지원자. 사진 제공 제미로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반, 록 뮤지컬 ‘헤드윅’ 주연 오디션이 열린 서울 대학로 라이브 극장.
남자에서 여자가 된 트랜스젠더 가수 ‘헤드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한 남자(또는 여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록 음악에 담아 냈다. 2001년 영화가 먼저 상영돼 국내에도 마니아 팬들이 적지 않은 작품.
극의 90% 이상을 이끌고 가는 ‘헤드윅’은 남자배우라면 한번쯤 탐내 볼 만한 역이다. 오디션에는 “헤드윅을 위해 15kg이나 감량했다”는 ‘노력파’부터 “헤드윅은 반드시 제가 해야…”라는 ‘소신파’까지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한 45명이 참여했다.
○ “헤드윅 마니아 눈에도 들어야지”
록 뮤지컬 ‘헤드윅’ 주연 오디션 장에서 금발 가발을 쓰고 나온 지원자가 심사위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제공 제미로
‘트랜스젠더’라는 주인공 특성 때문인지 오디션 분위기는 독특했다. ‘헤드윅’의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가죽 반바지에 망사 스타킹을 신거나, 금색 가발에 화장까지 하고 나온 지원자도 있었다.
심사위원은 ‘헤드윅’의 연출자 이지나 씨와 음악감독 이준 씨 등 7명. 이날 오디션에는 이례적으로 ‘헤드윅’ 마니아들도 초청됐다. 제작사인 제미로 측은 “국내의 ‘헤드윅’ 마니아는 5만∼6만 명”이라며 “뮤지컬 흥행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캐스팅 때부터 의견을 들어 보기 위해 초청했다”고 밝혔다.
오디션이 시작됐다. 지정곡은 ‘헤드윅’ 삽입곡 중 가창력이 드러나는 ‘테어 미 다운’과 감미로운 록 발라드 ‘미드나이트 라디오’.
시간상 자유곡은 지정곡을 부른 뒤 가능성 있는 후보에게만 주문했다.
“자유곡도 한번 부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원자들의 ‘읍소’에도 심사위원들은 냉정했다.
상반신 노출이 있는 작품인 만큼 ‘배가 나왔는지’를 보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은 지원자들에게는 겉옷을 벗어 보라는 요구도 있었다.
○ 가수 이정열 “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서”
오후 4시 배우 오만석이 오디션을 보러 왔다. 연기력과 준수한 외모를 갖춘 오만석은 요즘 뮤지컬 제작자들이 앞 다투어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 주연급 배우. 오만석은 외모, 노래, 자세(연기)에서 고르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오디션이 끝나 갈 무렵 언더그라운드 가수 이정열도 나타났다. 캐스팅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헤드윅’의 노래를 한번 불러 보고 싶어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
오후 6시. 오디션이 끝났다. 45명 중 5명으로 후보가 압축됐지만 심사위원들은 끝내 결론을 내지 못 한 채 5명을 대상으로 다시 오디션을 하기로 했다.
최종 후보에 들지 못한 ‘헤드윅’ 마니아 황재현 씨는 “연기 경험이 없다는 약점을 알면서도 ‘헤드윅’이 좋아 지방에서 일부러 오디션을 보러 올라왔다”며 발길을 돌렸다.
캐스팅 결과는 14일 발표된다. 공연은 4월 12일부터 6월 12일까지.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