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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견! 아줌마]아줌마의 손

입력 | 2005-02-02 17:48:00


《김순이 씨(53·경기 광명시 하안동)는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과 아들의 아침식사를 챙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들이 바깥에서 행여 흐트러져 보일세라 옷깃에 묻은 작은 먼지 하나까지 세심히 떼어낸 뒤 문 밖까지 배웅한다. 그는 오늘 하루도 가족들이 안녕하길 바라며 손을 흔든다. 이어지는 집안일에 김 씨는 손이 마를 날이 없다. 주부습진은 그에게 오랜 벗과 다름없다. 김 씨는 “이제는 주름투성이지만 이 손으로 30년 넘게 가족들을 돌봐 왔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중풍으로 몸이 편치 않은 시어머니를 돌보는 최명선 씨(42·서울 강동구 암사동). 최 씨는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어머니가 분명하게 말은 못 하시지만 환하게 웃으시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아줌마’의 손이 맡고 있는 역할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어머니’에서 ‘아내’와 ‘며느리’에 이르기까지…. 집안과 가족을 세심하게 챙기는 손길에서 ‘대한민국의 힘’이 시작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줌마의 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일 오후 10시 서울 영등포역 앞 광장.

“드시고 힘내세요”
1일 밤 서울 영등포역 광장 앞에서 강서아파트연합부녀자원봉사회 ‘일어서기’ 소속의 아줌마들이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나눠 주고 있다. 주 1회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은 “노숙자들이 ‘이모’라고 부르며 마음을 열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며 밝게 웃었다. 신원건 기자

뼛속까지 파고드는 영하 12도의 추위를 뚫고 빨간 조끼를 입은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나타났다. 매주 화요일 밤 이곳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서울 강서아파트연합부녀자원봉사회 ‘일어서기’ 소속 주부들.

“솔직히 오늘은 너무 추워 나오기 싫었지만 다들 기다릴 거라는 생각에 집에 있을 수 없었어요.”

간이배식대를 차리는 이은자 씨(56)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들통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김치국밥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추위에 얼어붙었던 노숙자들의 얼굴에도 훈훈한 기운이 번졌다.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분들도 저희에겐 ‘어머니’ ‘이모’라 부르며 속을 터놓아요. 저희도 가족을 위해 매일 하는 밥을 조금 더 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죠.”

봉사회장 김복남 씨(58)는 부스스한 행색의 50대 여성을 여동생 대하듯 다정하게 껴안으며 손에 살짝 김치꾸러미를 들려 줬다. 쪽방에 사는 남편과 나눠 먹으라는 아줌마들만의 특별한 배려다. 이처럼 ‘어머니’ ‘누이’의 마음으로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아줌마들의 손길이 사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이 되고 있다. 과거 시부모, 남편, 자녀들을 돌보며 헌신했던 손길을 이웃에게 돌려 사회의 그늘진 구석까지 섬세하게 챙기고 있는 것.

2002년 자원봉사 현황에 따르면 단체 자원봉사자 직업군 중 ‘전업주부’의 비율이 27.5%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여성 자원봉사자 중 조사 대상의 절반이 넘는 52.3%가 주부다.

“아프지 마세요”
아줌마 자원봉사자들이 독거 노인들을 방문해 건강상태를 체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웃을 향해 아줌마들이 내민 손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장애아동 병동에서 우리는 모두 ‘엄마’로 통해요. 뇌성마비로 수족을 못 쓰는 아이들이 ‘엄마 왔다’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못 잊어 매번 봉사하러 갑니다. 정말 내 아이들이 저렇게 불구가 돼 누워 있으면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

1998년부터 7년째 장애인을 돌보는 주부봉사모임 ‘둥지봉사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명자 씨(50)는 “내 자식, 내 부모처럼 느껴져 16세, 18세 장애인들 기저귀를 갈거나 노인분들 밑 닦아 드리는 일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고 두 아이를 키우다 암에 걸렸으면서도 몇 년째 재소자 상담, 영아 돌보기, 이혼 상담 등 다양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주부 장명렬 씨(52).

“내 가족을 돌본 경험을 통해 다른 이웃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며 “하루하루 부자가 되는 기분”이라고 자랑했다.

아줌마 특유의 활발함과 억척스러움 역시 아줌마 봉사자들이 가진 독특한 힘 중 하나. 목욕봉사나 치매노인 돌보기 등 대부분의 힘든 봉사는 아줌마의 억척스러움이 아니면 힘들다는 것.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김성이(金聖二) 교수는 “각박한 사회 속에 아줌마의 모성애적 자원봉사는 큰 의미를 지닌다”며 “어머니의 봉사는 자녀와 남편을 움직이는 가족 봉사의 시발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지원 기자 podrago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야! 동화사랑 아줌마다”…6년째 책읽어주기 주부 마희경씨▼

“자녀들이 잠들기 전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 주는 엄마의 손길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주부 마희경 씨(49·서울 서초구)는 주변 어린이들에게 ‘동화사랑 아줌마’로 통한다. 6년째 매주 구립 어린이집, 복지관 등 11개 기관을 돌며 ‘동화 읽어 주기’ 봉사를 해 왔기 때문.

마 씨는 2000년 마땅한 어린이도서관조차 없는 상황에서 책 읽는 즐거움을 알기 힘든 어린이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동화봉사단’을 꾸렸다.

“봉사하러 가기 전날 우리 아이들을 앉혀놓고 동화책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어 주면서 손동작 등을 연습합니다. 아이들이 동화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죠.”

그는 “동화 읽어 주기는 아이들을 잘 다루는 ‘아줌마’의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봉사활동”이라며 “다양한 억양과 재미있는 동작을 섞어 책을 읽어 주면 아이들이 매우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마 씨는 “봉사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품앗이’하듯 서로 나누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지원 기자 podrag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