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도시의 1970학년도 중학교 무시험 입학 추첨이 실시됐다. 지방의 9개 도시에서는 학생들이 수동식 추첨기로 학교 번호를 뽑았다. 서울의 추첨에는 우리나라 입학 사상 처음으로 전자계산기(컴퓨터)가 쓰였다. 연산처리장치에서 학교 번호가 결정돼 쉴 사이 없이 인쇄기로 찍혀 나왔다.’ (1970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부)
1960년대 초등학생들은 세칭 명문 중학교에 가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고 공부하기도 했다. 1968년 서울 초등학교 5, 6학년생의 월평균 과외비는 1만5000원(현재 약 30만 원). 당시 6학년 학생은 10만5000명, 과외·가정교사는 3만여 명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향한 열망은 두 차례 ‘파동’을 낳았다.
1965학년도 중학입시에 ‘엿기름 대신 넣어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이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정답은 디아스타제. 그러나 ‘무즙(汁)’을 답으로 골랐다가 낙방한 수험생의 학부모들은 소송을 내고 무즙으로 만든 엿을 증거물로 제출했다. 결국 38명이 추가로 합격 처리됐다. 이 와중에 유력인사 자녀들이 명문 중학교에 부정 입학한 사실도 밝혀졌다.
1968학년도 시험에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라는 문제가 나왔다. 복수정답 시비가 생겼고 낙방생 학부모들은 경기중학교장을 연금하기도 했다.
무즙과 창칼 파동 이후 정부는 중학입시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69년 서울, 1970년 10개 도시, 1971년 전국에서 무시험 추첨이 실시됐다.
어린이들은 입시 지옥에서 벗어났지만 준비되지 않은 평준화는 부작용도 컸다. 시설기준에 미달이거나 무자격 교사가 있는 중학교가 적지 않았다. 실력이 좋지만 ‘뺑뺑이’로 3류 학교에 배정된 학생의 부모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교사들은 0점부터 100점까지 수준이 크게 다른 학생을 어떻게 한 반에서 가르치느냐고 불평했다.
엊그제 서울시교육청은 1997년 폐지했던 초등학교 학력평가시험을 부활시키기로 발표했다. 학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교육 평등주의’ 부작용을 시정하겠다는 것.
초등학생들이 시험 부담 없이 자라면서 공부도 잘 하는 것은 현대판 두 마리 토끼일까.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