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금요칼럼/강홍빈]‘그림의 떡’ 서울광장

입력 | 2005-02-03 17:44:00


나는 평생 도시 공부를 하면서 행복했다. 도시는 삶을 키우는 밭이며 인류문명의 총체적 결실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내 전공이 부끄럽다. 믿음이 변한 건 아니다. 도시개발이 정략의 단골 수단이 돼 버린 세태 탓이다. 행정수도인지, 행정중심도시인지 그것의 건설만이 손바닥만 한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루는 길이라고 밀어붙이는 정치권, ‘환경복원’을 빌미로 개발을 부채질하고 강남북 균형발전을 구실로 땅값만 부추기는 서울시. 그 어디서도 도시를 통해 삶과 문명을 가꾸려는 진정성은 안 보이고 시민을 바보로 만드는 타산과 정치적 수사(修辭), 상징조작만 난무한다. 서울광장도 그 한 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시청 앞 광장에서 자동차를 빼내고 ‘서울광장’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이를 반겼다. 낡은 시청사를 헐거나 다시 지을 때 자연스레 함께 조성하는 것이 순리였겠지만 말이다. ‘붉은 악마’들로 채워진 시청 앞 광장이 축제의 도가니로 변하던 월드컵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30억 지구촌 TV 시청자에게 각인됐을 서울월드컵의 상징인 ‘월드볼’이 슬며시 변두리로 쫓겨나도 눈을 감았고, 세금 들여 공모한 당선작이 파기돼도 모른 체했으며, 교통이 뒤엉켜도 참았다.

▼잔디 위한 ‘닫힌 광장’ 아닌가▼

그런데 정작 탄생한 것은 시민을 위한 열린 광장이 아니라 잔디를 위한 닫힌 광장이었다. 이 나이가 되기까지 세계의 시청 광장, 도심 광장을 많이 봤지만, 잔디보호를 위해 시민 출입을 제한하는 광장은 처음 본다. 지킴이까지 두어 시민이 오래 머무는지, 하이힐을 신었는지, 무거운 물건을 들었는지, 불순한 집회를 여는지 감시한다.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아예 광장을 시청사의 ‘부설(附設)광장’으로 ‘시설결정’하겠다고 한다.

시의 고민도 이해는 간다. 단골 시위무대, 노숙자 천국이 될까 걱정일 것이다. 하루 종일 울리는 꽹과리, 확성기 소음으로 회의 진행이 어렵던 기억도 있다. 감당 못할 일을 했다 싶기도 할 것이다. 잔디보호로는 명분이 약하니 아예 법적으로 시청사의 일부로 만들어 통제권을 갖자는 발상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본말전도(本末顚倒)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시청에서 최근에 펴낸 ‘도시계획사전’에 따르면 건축물 부설 광장이란 ‘건축물의 이용 효과를 높이기 위해 건축물의 내부 또는 그 주변에 설치하는 광장’이다. 아무리 해도 서울광장이 시청의 이용 효과를 높이기 위한 부속 공간이라는 건 너무하다. 그런 논리라면 대통령이 촛불시위가 못마땅해 세종로를 종합청사의 부속 공간으로 ‘시설결정’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시위가 걱정되면 관련 규정을 정비하고 실행할 일이다. 편법을 쓸 일은 아니다.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도 시청의 차원을 넘어선다. 일제가 지금 자리에 시청을 세우기 훨씬 전,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던 고종황제는 지금의 서울광장 건너편에 원구단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여기를 핵으로 서울의 가로망을 재편할 구상도 했다고 한다. 고종의 인산(因山) 행렬도 여기를 지났다. 그 후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민족사의 아프고 즐거운 기억이 이 장소에 새겨져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전유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시대착오적 발상 버려야▼

광장은 열려 있기에 광장이다. 시민에게 열려 있지 않고 시민을 꺼리는 광장은 광장이 아니다. 사이버 공간이 일상화된 지금도 여전히 광장이 소중한 까닭은 도시민이 몸으로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마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론이 언어와 영상을 매개로 한 사회 공기(公器)라면, 광장은 장소를 매개로 작동하는 공공영역이다. 광장에서 우리는 시민이 되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광장을 만든 뒤 문을 반쯤 닫고 이제는 시청의 전유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언론 검열을 하겠다는 것만치나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적이다.

기왕 광장을 만들었으면 시민에게 활짝 열 일이다. 잔디밭과 스케이트장의 달콤한 이미지로 닫힌 광장의 현실을 덮는 것은 시민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다. 잠시 성공할지는 몰라도 그 마음을 길게 잡지는 못한다. 편법이 아니라 정도를 택하기 바란다.

강홍빈 객원논설위원·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계획학 hongbinkang@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