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돌아왔다.
이번엔 글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는 20년 지기인 이목일 화백(54)과 함께 ‘자연과 생명’ 전을 경남 거제 문화예술회관에서 20일까지 여는 데 이어 같은 전시를 3월 창원, 5월 서울에서 잇달아 갖는다. 이 화백의 판화 50여 점, 마 교수의 판화 5점과 유화, 수묵화 등이 전시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거침없는 모습으로 그림과 글, 퍼포먼스를 보여 온 두 사람의 2인전이 요즘 화단에서 화제다. 오랜 칩거를 마치고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는 마 교수의 근황이 궁금해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을 찾았다.
“TV 보니까 조영남 씨는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머리숱도 검고 많더라고. 부러워 죽겠어요. 나는 벌써 머리가 하얗게 세고 벗겨졌으니 어떡하면 좋아.”
마광수 작 '기다림'(2000년,50x37cm)
과연, 독신으로 사는 마광수는 늙어 보였다. 쉰 넷의 나이보다 ‘조로(早老)’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양미간에 팬 깊은 주름과 숱 적은 흰 머리칼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스물여덟 살에 대학교수가 되고 서른 살 넘어 출판하는 책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인생의 정점에 서 있어야 할 40대에 필화(筆禍)와 구속, 직장에서의 퇴출, 그리고 우울증까지…. 남들은 한번 겪기 힘든 고초를 한꺼번에 소나기 맞듯 겪었으니 무쇠 같은 몸인들 견뎌낼 재간이 있었겠는가.
외모는 세월과 고통에 항복했을지라도, 그러나 ‘정신’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목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무엇보다 솔직했다. 상대방이 뭐라 생각하건 개의치 않는 듯했다.
―웬 그림이죠, 글로부터의 도피인가요?
“시각언어(그림)나 문자언어(글)나 ‘묘사’라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권태’(1990년) 같은 소설은 하루에 일어난 일을 묘사한 책입니다. 손톱 묘사, 머리 묘사, 옷 묘사…우리나라 사람들은 묘사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서사를 중요시하는데, 난 아닙니다. 글도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하다가 ‘야하게’ 해서 걸린 거지요.(웃음) 사실, 글이 더 어려워요. 단어를 골라야 하니까. 미술은 덧칠하고 나이프로 긁고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즉흥성이 있죠. 글보다 훨씬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글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벌써 미술전이 세 번째인데….
“초등학생 때 미술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직장에서 잘렸을 때는 그림만 그렸던 적도 있어요. 첫 전시는 1991년의 에로틱 아트 그룹전이었고, 1995년에 첫 개인전을 했지요. 사람들이 나를 소설가로만 아는데, 사실 그동안 많이 그렸습니다. 첫 직장도 홍익대였어요. 미술 하는 제자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이불과 강리나가 다 그때 제자들입니다.”
―글은 이제 안 쓰시나요?
“소설 써 놓은 게 세 권이나 있는데, 낼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야하지 않은 것부터 먼저 낼까 생각 중입니다.”
―요즘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세상 아닌가요.
“세상 좋아졌다고 하지만, 외부검열은 여전하다고 봅니다. 영화는 많이 나아졌지만 글은 안 그렇습니다. 게다가 ‘글’ 때문에 고초를 겪다 보니, 자기검열이 몸과 정신에 밴 것 같아요. 그게 가장 미치겠어요.”
―다시 돌아간 학교생활은 어떠신가요.
“너무 신나요. 학생들 만나니까. 요즘 학생들은 내가 1980년대에 예견했던 대로 하고 다녀서 그런 거 보는 재미도 있지요. 매니큐어, 손톱, 피어싱, 염색… 그거 다 내가 이미 말한 거예요. 그땐 퇴폐적이라고 욕 들었는데 요새는 코걸이 하는 여자도 있지요.”
―학생 팬이 많을 것 같은데….
“팬은 많은데 학생들이 아니라 아줌마들이에요.(웃음) 마흔 살 때까지만 해도 여학생 팬이 많았는데 지금은 머리 다 빠지고 하얘지니까 아버지 취급해요. 외로워 미치겠어요. 연애하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는 ‘자유롭게 말하고 쓰겠다’는 마광수와 ‘그러다 또 당할지 모른다’는 또 다른 마광수가 싸우고 있는 듯 보였다. 그가 어떤 ‘마광수’를 택할지 지켜볼 일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