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남쪽 지방에 폭설이 내렸어요. 비닐하우스 지붕이 눈의 무게 때문에 주저앉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다가, 몇 해 전 큰 눈이 내리던 날 경부고속도로 가운데 꼼짝없이 갇혔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서른 시간이 넘게 걸렸던가요. 선생님이 계신 미국이라는 나라가 제게는 그렇게 물리적 거리를 넘어, 참 ‘먼 곳’으로 느껴집니다.
가끔은 그 큰 나라를 움직이는 내부의 가치들이 몹시 단순하다는 데 놀라곤 합니다. 한때 영웅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가장이 되어 버린 한 남자가 위험에 빠진 가족을 구하고 가족애를 회복하며 나아가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을 보는 내내 즐겁게 웃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뭔가 찜찜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어요. 유년시절부터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세대인데도, 왜 저는 미합중국이라는 나라만 생각하면 이토록 복잡한 심경이 되는 걸까요?
선생님, 샌프란시스코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를 만났다고 하셨지요? 그곳에서 베르메르의 순회전시회가 열리고 있나 보죠? 17세기 베르메르의 그림을 소재로 한, 슈발리에의 동명 소설은 하나의 예술 작품에 대한 서사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의미심장한 사례일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화가 베르메르의 삶을 둘러싼 이 여성 소설가의 도발적 상상력에 대해 베르메르의 실증적 연구자들이 무척이나 불편해 했다는 뒷얘기가 있지요. 아마도 그들은 화가의 사생활에 대한 허구적 서사가, 그 대(大)화가의 예술적 권위를 훼손하게 될까 봐 두려웠나 봅니다.
‘키치’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고전의 명작들은 무차별로 대량 복제되고 변형되어 현대의 일상적 공간 안에 널려 있습니다. 저 유명한 모나리자의 얼굴은 쟁반이나 포장지에 인쇄되는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시사풍자 패러디의 이미지로도 활용되더군요. 가짜들이 너무 많아 진짜를 구별하기 힘들고 아예 ‘원본’의 개념조차 흐릿해진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대중이 예술을 향유하는 형태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요? 새로운 환경에서 ‘원본’이 새로운 방식으로 몸을 바꿔 다시 살아나는 거지요.
진짜와 가짜의 구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 되는 예술 작품의 위대성입니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예술가의 영혼! 소설은 써지지 않고, 그 영혼의 그림자라도 슬쩍 엿보고 싶어지는 나날입니다. 선생님, 이국에서 맞는 명절, 쓸쓸하지 않게 보내세요.
정이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