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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이중원]사회운동가 아인슈타인

입력 | 2005-02-04 18:02:00


20세기 현대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위대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우주 탐구에 바친 열정만큼 평생 파시스트 정권의 횡포, 부당한 국가의 억압, 배타적 민족주의, 전쟁, 핵무기 확산, 군비경쟁, 인종차별주의 등 비도덕적이고 반문명적인 행태들에 맞서 싸웠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반전(反戰) 평화주의자다. 1차 세계대전 중 반전 성명 발표를 시작으로, 전쟁 후엔 국제연맹 산하의 지적협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통치권자들의 손에 국가의 운명을 맡길 게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해 배타적 국수주의나 군비확장을 경계하도록 노력했다. 또한 군비축소와 세계 평화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형식적인 위선 외교 대신 분쟁을 조정할 국제사법재판소의 역할을 강화하고 이 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도록 각국이 조약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다.

노벨상 수상 후인 1925년엔 의무병역제의 철폐를 강력 주장했고 과학기술이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 개발에 악용되는 현실을 개탄하며 과학자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도와주는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협회’ 결성을 제안했다. 국가가 개인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강요할 때 이에 불복종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군국주의가 드셌던 독일에서 늘 공격의 표적이 됐고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엔 나치정권에 의해 시민권이 박탈되고 재산이 몰수되며 5만 마르크의 현상금까지 걸렸다.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1939년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위협을 우려한 동료 과학자들의 요청에 따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원자탄 개발을 미국에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원자탄 개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실제로 개발되는지도 몰랐다. 원자탄이 투하된 직후 그는 자책하면서 전쟁의 영원한 종식과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위한 초국가적인 ‘세계 정부’의 구성에 몰두했다. 1950년엔 TV에 출연해 수소폭탄 개발계획 등 미국의 핵무기 확산을 강하게 성토했고, 1955년 심장병으로 숨지기 직전까지 핵무기 폐기와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줄기차게 외쳤다.

이 밖에도 아인슈타인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계 경제의 위기, 소수 민족의 권리, 인종차별, 학문과 사상의 자유, 인권, 종교와 과학, 참교육, 개인과 국가, 과학의 국제화,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화해 등 시대적 아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사상가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이탈리아 과학자들에게 파시스트 체제에 충성맹세를 하지 말도록 종용한 일이나 1953년 매카시즘에 맞서 청문회에 소환된 증인들에게 증언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글을 신문지면에 기고한 일들을 보면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한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좌익에 공감하는 위험인물로 분류돼 미국 연방수사국의 1급 감시대상이 되었다. 이 외에도 인종차별반대 단체 등 수십 개 진보단체의 후원자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에는 부당한 권력이나 제도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자유와 도덕적 정의가 사회 발전의 초석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자율적인 개인의 창의적 능력이 과학 발전에서 중요한 것처럼.

이중원 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