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 자가 주인을 위협하여 노비문권을 불사르고 양인(良人)이 됨을 강제로 승인케 하거나 혹은 그 주인을 결박하여 주리를 틀고 곤장과 매를 치기도 했다. 노비를 가진 자들은 불살라지는 노비문권을 보면서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던 조선 사회에 커다란 변화가 밀어닥쳤다. 수백 년 동안 숨죽여 지내오던 노비들의 반발이었다. 양반에게 폭력을 가하고 양반 무덤을 파헤치는 등 노비들의 ‘테러’는 점차 과격해졌다. 노비로부터 곤욕을 당할까봐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는 양반까지 생겨났다. 조기후기 학자 황현(黃玹)의 저서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당시 양반의 눈에 비친 노비제의 혼란상이 담겨 있다. 그는 “이제 양반 지배의 사회질서는 끝났다”고 말했다.
노비해방 운동이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자 고종은 1886년 2월 5일 노비세습제 폐지를 공포했다. 8년 후 갑오개혁에서 양반-양인-천민으로 이어지는 신분제 자체가 폐지되면서 노비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비제를 이미 폐지한 서구열강과의 교류 확대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지만 노비제 균열 조짐은 이미 1500년대 말 임진왜란 때부터 감지됐다. 고조선 시대에 시작된 노비제는 조선 초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왜란을 겪으면서 정부는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운 노비는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군공제’를 실시했다. 전후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정부는 일정량 이상의 양곡을 바치는 노비는 양인으로 올려주는 ‘납속제’도 도입했다. 전통적 신분체제를 고수해야 할 왕조 자체가 여러 가지 시책을 통해 노비 신분상승의 길을 터놓은 것이다. 그 결과 조선 초기 전인구의 40%에 달했던 노비 비중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10% 아래로 떨어졌다. 돈만 있으면 양인이나 양반이 될 수 있는 시대에 노비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전통적 신분질서가 붕괴되면서 한국사회는 자본가-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된 근대국가로 탈바꿈했다. 어느 사회에나 계급은 존재한다. 다만 계급 이동의 가능성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과 성숙 정도를 결정지을 뿐이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