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내가 유방처럼 여지없이 싸움에 져서 홀로 쫓겨도 사방에서 절로 알고 찾아오는 우리 군사들이 그만큼 될까? 멀리 관중에 남아 있다가 내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패망했다는 소문을 듣고도 보름이 안돼 몇 만 군사를 뽑아 보낼 상국(相國)이 내게도 있는가.’
아마도 그때 패왕의 가슴을 섬뜩하게 한 것은 문득 머릿속을 스쳐간 그런 자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맞수로서 유방의 실체를 패왕이 처음으로 절감한 순간이었다.
“알았다. 그럼 관동의 요해를 지키라고 남겨둔 우리 장수들은 모두 어찌 되었다더냐?”
이윽고 부글거리는 속을 어렵게 다스린 패왕이 외황에서 온 이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이졸이 그제야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한군(漢軍)에 항복했던 왕무 장군과 정거 장군은 다시 대왕께 돌아오려다가 한나라 장수들과 싸우는 중이고, 위공(魏公) 신도와 주천후 등도 한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 합니다.”
“그렇다면 용저와 종리매도 그들과 연결해 유방을 치면 되지 않느냐?”
그러자 다시 그 이졸의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두 분 장군께서 그곳에 이르기 전에 이미 모두가 한군에 지고 쫓겨난 터라 그들과 연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남북으로 흩어졌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 한둘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도 군세가 보잘것없다는 소문입니다.”
그때 다시 범증이 나섰다.
“대왕, 더 늦춰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이라도 크게 군사를 일으켜 형양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끈질기기가 잡초보다 더한 유방이 관중으로 돌아가 다시 기운을 차리기 전에 사로잡아 그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때는 패왕도 그런 범증이 옳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고집 때문에 바로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이오. 유방이 이미 적지 않은 군사로 형양성에 들어 굳게 지키기로 했다면 서두는 것만으로 될 일은 아닌 듯싶소. 아부의 말대로 깊이 박힌 뿌리를 캐내자면 맨손으로 아니 되잖소?”
난데없이 침착해져 대답은 그렇게 대꾸해 놓고도 얼른 군사를 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서쪽에서 패왕의 출발을 재촉하는 일이 생겼다. 패왕이 왕으로 세웠으나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한왕 유방에게 항복해 버렸던 위왕(魏王) 표(豹)가 사자를 보내와 글을 올렸다.
‘위표(魏豹)가 삼가 대왕께 문후 드립니다.
저는 대왕의 은의를 입어 서위왕(西魏王)에 올랐으나, 세부득(勢不得)하여 한왕에게 항복한 뒤 팽성까지 따라가서 대왕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지난번 소성(蕭城) 밖에서 대왕을 뵙고도 바로 대왕께 돌아가지 못한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오나 싸움터를 벗어나 봉지(封地)에 돌아와 보니 한왕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가려진 눈과 막힌 귀가 뚫린 듯 천하의 형세가 새로 훤히 보였습니다. 엉킨 삼 타래 같은 세상일을 한칼로 잘라 풀어버리고 천하를 바로잡으실 분은 대왕밖에 없습니다. 이에 위표는 길게 목을 늘이고 죄를 빌며, 다시 한번 대왕을 위해 일할 수 있기를 비오니 부디 거두어 주옵소서.’
위왕 표가 보낸 글은 대강 그랬다. 읽기를 마친 패왕이 물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