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색역 대합실에서 죽은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손자(유지태)는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위 사진). 단층 역사와 작은 대합실이 시골 간이역을 연상하게 하는 이 수색역 건물은 이달 말 헐려 사라질 예정이다. 장강명 기자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열병처럼 찾아온 젊은 날의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 ‘봄날은 간다’(2001년 작)는 서울 은평구 수색동 수색역(경의선 기차역)에서 시작한다.
노망이 든 할머니는 역 대합실에서 죽은 남편을 기다린다. 손자 상우(유지태)가 이제 그만 가자고 달래도 할머니는 들어오는 기차를 살피기 바쁘다. 손자의 부축을 받아 역을 나가면서도 왜 남편이 오지 않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인 할머니.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갔으며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모른다.
연상의 여인 은수(이영애)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느냐고 서글픈 항의를 한 뒤에도 상우는 또 수색역을 찾는다. 할머니는 변함없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관사였던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영화에서 기차역은 이별의 장소나 기다림의 장소로 종종 등장한다. 특히 ‘봄날은 간다’에서의 수색역은 이미 떠나 버린 사람을 기다리는 애절한 장소다.
서울시내에 있는 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출하고 아담한 기차역으로, 영화의 서글픈 정서에 딱 맞는 곳이다. 경의선 가좌역과 화전역 사이에 있는 역으로 지하철 6호선 수색역과는 전혀 다르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근히 재미있는 게 통상적인 역할 개념의 역전이다. 연상녀-연하남이라는 설정이나 주인공 남녀의 직업(여자가 PD, 남자가 녹음기사)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사는 동네 묘사도 기존 인식을 벗어난다. 은수는 강원 강릉시의 아파트에서 도회적인 생활을 누리며 살지만 서울 사람인 상우는 단층건물이 많은 시골 같은 동네에서 3대가 함께 산다.
실제로 수색역 앞은 단층건물의 ‘역전이발관’ ‘역전식당’ 등이 있어 시골 분위기가 풍긴다. 수색(水色)이라는 동네 이름은 장마철만 되면 물이 차올라 온통 물 일색이 된다 해서 붙었다는 말도 있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는 돌탑은 역 직원들이 쌓은 ‘무재해기원탑.’ 나이가 100살이 넘는다는 굵은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역 앞에 서 있다.
현 수색역 건물은 경의선 복선화 사업으로 인해 이달 말 사라진다. 수색역은 28일 서쪽으로 100여m 떨어진 신역사로 자리를 옮기며 ‘봄날은 간다’에서 안타까운 기다림의 장소였던 현 역사는 헐려 기차선로가 된다.
서울역이나 신촌기차역에서 경의선을 타면 20분 안에 갈 수 있다. 곳곳에 아파트촌과 건설현장이 펼쳐져 정취가 반감되는 게 아쉽지만 행주산성(능곡역)이나 백마카페촌, 일산 호수공원(백마역), 금강산랜드(월롱역), 임진각관광유원지(임진강역), 제3땅굴(도라산역) 등을 찾아갈 수 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