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인 놀부에게 모든 재산을 뺏긴 흥부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일하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자리는 적었다. 흥부는 결국 임시직과 실업을 오락가락하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되고 만다.
농번기에야 품삯이라도 벌어서 식구들을 굶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한기에는 일거리가 아예 없었다. 이때 흥부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 일을 보자.
그는 우연히 관가에서 매를 대신 맞아 줄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진사 대신에 매를 30대나 맞고 매 값을 벌었다. 흥부 가족들은 한 끼나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매 맞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다. 일할 의지마저 상실한 흥부는 놀부 집으로 쌀 구걸에 나서야 했다. 얻은 것은 뺨에 날아 온 형수의 밥주걱이 전부였다.
그렇게 농한기를 버틴 흥부는 농번기에 다시 품삯을 받아 식구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만약 제비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흥부는 실업과 임시직, 비경제활동인구를 전전하면서 절대빈곤을 대물림했을 것이다. 자녀들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대통령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의 근로빈곤층 규모는 132만 명으로 추산됐다. 부양가족까지 감안하면 대략 400만 명에 이른다는 얘기다.
132만 명의 현대판 흥부에게 제비 로또의 신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공해로 제비도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제비를 만난다고 해도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다. 의타심과 사행심에 빠진 흥부 가족들이 다시 근로빈곤층으로 전락할 가능성만 높일 뿐이다.
그렇다고 놀부가 흥부에게 때마다 쌀을 주는 것도 문제다. 흥부가 일자리 찾기를 그만두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들게 일하기보다는 편하게 사는 것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흥부는 비경제활동의 절대빈곤층으로 떨어지면서 빈곤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관가에서 매 맞는 일도 불사했던 흥부에게 적절한 일자리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흥부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생산계층으로 자립하면서 빈곤인구가 그만큼 줄고 경제의 인적자원도 증대될 것이다.
이는 흥부나 사회에 모두 도움이 되는 결론이다. 흥부로선 스스로 번 소득으로 가족을 부양했다는 점에서 가장으로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자녀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자립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는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계층의 자립을 주요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정부와 기업이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 힘을 쏟는다면 흥부의 자립은 그만큼 더 빨라질 것이다.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