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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신간]“헤겔 통합정신, 동양철학과 통해”

입력 | 2005-02-15 18:50:00

도자기를 구워낼 때 초벌, 재벌, 세벌 구이를 통해 명품이 나오듯 근 30년의 세월을 바쳐 헤겔의 ‘정신현상학’ 을 세차례에 걸쳐 번역해 낸 임석진 교수. 신원건 기자


■‘정신현상학’ 세번째 번역본 낸 임석진 교수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73)는 최근 헤겔 ‘정신현상학’의 세 번째 번역본(한길사·전 2권)을 펴냈다. 1980년 분도출판사에서 직역 중심의 초판본을 냈고, 1987년 지식산업사에서 의역 중심의 개정판을 낸데 이어 18년만의 일이다. 이번 판에서는 일본어 번역어인 ‘즉자’(卽自ㆍAnsich)나 ‘대자’(對自ㆍFursich) 같은 용어를 문맥에 따라 ‘본래적인 것’, ‘본원적인 것’, ‘자각적인 것’, ‘의식화된 것’ 등 쉬운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고, 900개에 가까운 주를 달았다.

“초판본에 2년, 재판본에 다시 2년의 세월을 받쳤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9년의 세월을 투자했습니다. 하지만 ‘정신현상학’ 일본어 번역에 1920년대 중반부터 1979년까지 반세기의 세월을 받친 일본의 가네코 다케조(金子武藏)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임 교수는 “‘정신현상학’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약 10개의 언어로만 번역됐지만 이처럼 주가 많이 달린 것은 가네코의 책 이후로는 처음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헤겔이 37세 때인 1807년에 발표한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신-지각-오성-자기의식-이성-정신으로 이어지는 인간정신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적 통합의 논리로 풀어낸 그의 대표 저작. 그러나 난해한 내용으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국내 번역본도 임 교수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사실 ‘정신현상학’의 첫 번역에는 사회변혁을 꿈꿨던 당시 시대풍조가 큰 몫을 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주노변증법)이 1980년대에는 계급투쟁의 논리를 뒷받침할 모델로 각광받았으니까요. 그러나 주노변증법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에는 다시 상호인정의 상생 모델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21세기 미국에서 변증법적 통일 논리에 주목한 ‘뉴 헤겔리안’ 철학자들이 각광받는 것은 헤겔 철학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1961년 헤겔 연구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그는 1987년 창립된 한국헤겔학회 초대 회장을 맡아 2002년까지 이를 이끄는 등 한평생을 헤겔 연구에 받쳤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기도 했던 임 교수는 “모든 철학은 결국 관념론”이라며 철학에 리얼리즘을 도입하려 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했다.

“헤겔 철학은 분리보다는 통합을 강조하고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환원의 논리를 지녔다는 점에서 동양철학적 전통과 맥이 닿아있어요. 이에 대한 후학들의 본격적 연구를 위해 시동을 건다는 생각으로 주를 달면서 주역, 도덕경, 장자, 원효의 화쟁(和諍)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혔어요.”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