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개봉되는 ‘에비에이터(Aviator)’는 미국의, 미국을 위한 영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스타와 그가 연기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라는 매력적인 실존인물이 있지만 그 둘을 압도하는 숨은 주인공은 바로 휴즈를 낳았던 시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늙은 유럽을 대신해 전 세계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해가던 20세기 초의 미국이며 그 열광적 에너지다.
○ “그 무엇도 충분치 않아”
하워드 휴즈(1905∼1975). 193cm 키의 늘씬한 미남. 승부를 거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모험가형 기업가. 하프컵 브래지어를 고안한 발명가. 영화사 RKO와 항공사 TWA의 소유주이면서도, 스스로 비행기 조종을 즐겨 세계최고 속도기록을 낸 비행사.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진 할로, 진저 로저스…. 당대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던 바람둥이. 평생 감염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 말년에는 무균 처리된 유리방에서 생활했던 강박증 환자. 세금을 피하기 위해 신규 전입자에게 주어지는 면세기간 만큼만 나라와 주를 옮겨가며 살았고, 생애 마지막에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에도 연루됐을 만큼 정 관계와 검은 뒷거래를 서슴지 않았던 억만장자.
‘에비에이터’에서 스코시즈 감독은 실존 인물 휴즈의 이 다면성 중 만족을 모르는 모험가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연약한 소년이라는 대조적인 두 얼굴을 골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사진 제공 영화방
휴즈가 비행기록 갱신을 위해 도전할 때, ‘미친놈’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천문학적인 규모의 제작비를 퍼부어 첫 영화 ‘지옥의 천사’를 만들 때, 그때까지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높이인 2만 피트 이상을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개발하라고 기술진을 닦달할 때, 그가 부하들과 자기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말은 언제나 “충분치 않아, 충분치 않아(not enough)”였다. 그런 휴즈가 평생 어머니가 가르쳐준 단어 ‘검역소(檢疫所·quarantine)’의 철자를 주문처럼 외우며 감염공포에 시달리고, 연인인 캐서린 헵번(케이트 블란쳇)의 품에 안겨서 “미칠까봐 걱정돼”라고 몸을 떤다.
포기를 모르는 도전자와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한 소년의 공존. 스코시즈가 다른 누구도 아닌 디카프리오를 자신의 휴즈로 택한 이유다.
○ 비행사, 시민, 하워드 휴즈
디카프리오라는 대중적 흥행 코드와 1930년대 할리우드 풍경의 재현 등 눈부신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에비에이터’의 상영시간 2시간 49분은 관객에게 길고 무겁다. 이는 하워드 휴즈를 통해 미국사(史)를 쓰려한 스코시즈 감독의 야심의 무게일 수 있다.
스코시즈의 의도는 휴즈가 경쟁사인 팬암과 항공노선 다툼을 벌이다가 의회청문회에 서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로비를 받아 팬암의 해외노선 독점을 비호하는 상원의원에 맞서 휴즈는 “나는 일개 시민(citizen)이다”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독점이나 특혜도 인정하지 않아왔다”며 ‘시장의 자유’ ‘신성불가침의 시민권’이라는 미국 건국이념에 해당하는 정서를 건드린다.
비행기 추락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 휴즈가 구조원에게 “내 이름은 하워드 휴즈, 비행사(aviator)”라고 밝히는 대목에도 감독의 의식은 투영된다. 스코시즈에게 휴즈는 억만장자 이전에 역풍을 뚫고 날아오르려 도전하는 ‘위대한 미국 시민 모델’인 것이다.
28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1개 부문 후보로 지명된 ‘에비에이터’. 미국정신 찬가를 만든 스코시즈가 생애 첫 아카데미 감독상 트로피를 안게 될까? 18세 이상 관람 가.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