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현실을 봐, 슈렉. 넌 괴물이야. 그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녀를 놔줘.”
―‘슈렉 2’에서 요정 대모가 슈렉에게》
뜨끔한 말이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놓아주라니. 괴물인 너와 온갖 지리멸렬한 궁상을 함께 겪자고 그녀를 괴롭히지 마라, 그녀가 너 없이도, 아니 네가 없으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충고다. 자기 자신 혹은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길이라는 조언 같지 않은가.
‘슈렉 2’(DVD·CJ엔터테인먼트)에서 ‘해피 엔딩’ 전문인 요정 대모가 슈렉에게 ‘그녀를 놓아주라’고 설득할 때, 그 할머니의 속셈이 슈렉을 없앤 뒤 애지중지하는 자기 아들을 피오나 공주와 결혼시키려는 것만 아니었다면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릴 뻔했다. 그런데, 만약 요정 대모에게 그런 꼼수가 없었더라면? 이건 맞는 충고가 아닐까?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준다는 건 상대방과 더불어 행복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을 전제로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가혹한 일이다. 슈렉이 피오나 공주를 놓아주는 건, 그녀와 어울리지 않고 그녀를 도저히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괴물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피오나 공주를 놓아준다면 슈렉은 평생 괴물밖에 안 되는 스스로를 혐오하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슈렉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가 달라지겠다’며 인간이 되는 마법의 묘약을 들이킨다. 그렇게까지 달라지려고 노력한 슈렉에게 피오나 공주는 ‘당신의 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면서 더 큰 사랑으로 화답한다.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한다. 슈렉이 그렇게까지 애썼는데 그냥 고맙게 받고 말지.
영화에서 들었던 기이한 사랑 고백으로 치자면 ‘글루미 썬데이’(비디오·크림)를 뛰어넘는 것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자보는 아내 일로나가 피아니스트 안두라스와 사랑에 빠지자 “그녀를 잃느니 절반이라도 갖겠다”고 선언한다.
절반이라도 갖겠다니. 이건 근대의 일부일처제와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성립해 놓은 ‘사랑=배타적 소유’라는 공식에 어긋난다. 혼자 독점하는 사랑을 강탈당하고도 자보는 자존심도 없나.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도 없단 말인가. 오쟁이 진 남편인 주제에?
하지만 엄청 팔자 좋은 일로나를 더 사랑한 건 기묘한 삼각관계를 불평하던 안두라스보다 ‘절반이라도 갖겠다’며 일로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아무리 오쟁이 진 남편이고 괴물이라 한들 사랑하는 걸 어쩌겠는가. 가히 ‘울트라 슈퍼 파워 슈렉’이라 할 만하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황지우의 시 ‘뼈아픈 후회’는 읽을 때마다 아프다. 하지만 요정 대모의 말처럼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단죄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보다 괴물인 자신이 더 괴롭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닐는지. 괴물인 나를 누군가가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욕망에 다름 아닐 테니까.
스스로가 괴물처럼 느껴질지라도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널 사랑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준다는 말은 자기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약한 연인의 변명 혹은 변심한 애인의 비겁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