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 신전 유적 위에 세워진 바르베리니 궁 입구에서 내려다본 팔레스트리나 주변. 로마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이 소도시에서 태어난 종교음악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는 출신지명을 딴 ‘팔레스트리나’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사진 정태남 씨
세운지 적어도 500년이 넘는 수수하고 허름한 산타가피토 대성당. 대성당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아주 작지만 유서 깊은 소도시 팔레스트리나에서는 가장 크다. 성당 안에는 미사 시간이 아닌데도 오르간 소리가 들린다. 그 음악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틀 속에서 독특한 선율과 색채와 음향이 묘한 균형을 이루며 성당 안 구석구석에 조용히 울려 퍼진다.
대성당 앞 광장은 좁은 골목길을 통해 따스한 남국의 햇살이 가득한 다소 널찍한 피에를루이지 광장으로 연결된다.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석상에는 ‘음악의 군주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에게’, ‘팔레스트리나가 낳은 불멸의 아들에게.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이라고 써있다.
○ 로마 건국시조 로물루스-레무스 형제 이곳서 유학
로마에서 미켈란젤로가 1546년부터 1564년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맡고 있는 동안 같은 장소에서 활동한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라는 젊은 음악가가 있었다. 그는 출신지 명을 써서 ‘팔레스트리나’라고 불린다. 1525년 또는 1526년 2월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보다 160년 이전 사람이다. 그는 가톨릭 교회음악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그의 작품은 18세기 후반부터 가장 이상적인 종교음악으로 칭송 받았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산중턱에 위치한 팔레스트리나는 현재 로마 시의 행정 구역에 속하지만, 교통이 혼잡스러운 로마로부터 완전히 격리돼 있어 별천지처럼 느껴진다. 웬만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작은 도시로, 이곳 고고학 박물관에는 진귀한 고대의 유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사실 이곳은 로마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크게 번성하던 경제적, 군사적, 종교적 요충지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변 언덕 위에 로마를 건국하러 가기에 앞서 여기서 먼저 유학했다는 학설이 최근에 발표되기도 했다.
현재는, 서슬이 퍼렇던 기원전 1세기의 독재관 술라가 이곳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정적들을 모두 섬멸하고 세운 포르투나 신전의 유적과 그 유적의 정상부에 바로크 풍으로 세워진 바르베리니 궁이 이 도시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영어로는 Fortune)는 팔레스트리나의 수호신이었다.
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팔레스트리나의 석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그가 태어난 곳이다.
○ ‘음악의 군주’ 조반니 피에를루이지의 고향
음악사에 등장하는 음악가들 중 멘델스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갔다. 멘델스존 이전에 행운을 누린 음악가를 꼽는다면 행운의 여신이 수호하던 이 땅에 태어난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즉 음악가 팔레스트리나가 아닐까?
1527년, 로마를 침입한 게르만 용병들이 로마를 온통 파괴, 약탈,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을 때 그는 안전한 이곳에서 유아시절을 보냈고, 소년시절에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소년성가대에서 수준 높은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 성당의 음악 담당자들은 당시 유럽 음악계를 주름잡던 플랑드르 악파의 마지막 계승자들이었다.
음악가 팔레스트리나는 그들로부터 배운 고딕 건축처럼 치밀하고 정교한 구축력을 지닌 음악에 이탈리아적인 색채를 가미하게 된다. 로마에서 활동하던 그는 1544년 가을, 당시 팔레스트리나의 델 몬테 추기경의 부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타가피토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1547년 돈 많은 집안의 고향 아가씨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고, 세 아들 모두 음악가로 성장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지만 이 시기에 그는 행복감에 젖어 작곡에 몰두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다시 한번 또 미소를 지었다. 델 몬테 추기경이 1550년 율리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니 당시 세상에서 최고로 막강한 후원자가 생긴 것이다. 교황을 따라 로마에 간 그는 베드로 대성당 최고의 악장으로 임명되어 반종교개혁 운동의 와중에서 맞게 되는 교회음악의 위기에서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피에를루이지 광장에 세워진 그의 석상 뒤로 보이는 돌집은 그가 태어난 곳. 그의 생가를 알리는 표시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팔레스트리나는 음악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음악가가 태어난 곳인데도, 석상 외에는 그를 기릴 만한 기념관이나 음악당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그의 청아한 음악이 들려올 듯한 피에를루이지 광장에는 아이들이 차는 축구공 소리만 귓전에 울릴 뿐이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현대적 다성음악의 모태 ‘마르첼루스 미사곡’▼
팔레스트리나에서 가장 큰 산타가피토 대성당.
‘마르첼루스 미사곡’은 팔레스트리나의 명곡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막강한 후원자 교황 율리우스 3세가 1555년 서거한 후, 그 해 4월 12일 성 금요일,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첼루스 2세를 위한 미사 때, 팔레스트리나가 감독하는 성가대는 그리스도 수난곡을 특별히 준비했다. 다성음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새 교황은 노래가 여러 성부로 엇갈려 고난의 신비한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매우 언짢아하며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이제 음악이 교황의 마음에 안 들면 팔레스트리나와 성가대는 모두 일자리를 잃을 판.
팔레스트리나는 고심 끝에 기적적으로 불과 몇 시간 안에 아주 새로운 미사곡을 작곡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르게 흘러가는 선율을 노래하더라도 같은 순간에 같은 가사가 나오도록 한 것이다. 이리하여 탄생한 미사곡은 가사의 내용도 신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동시에 음악도 매우 거룩하고 아름다워서 모든 사람들이 감명을 받을 수 있었다. 교황도 물론 흡족했다.
‘마르첼루스 미사곡’에 얽힌 이 일화는 후세 사람들이 살을 붙여 만든 이야기로 여겨지지만, 어쨌든 팔레스트리나는 다성음악의 기법을 원숙한 형태로 가다듬은 장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