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주년 삼일절을 앞둔 감회가 그 어느 때보다 깊다. 광복 60주년과 한일수교 40주년이 겹칠 뿐 아니라 ‘2005 한일 우정의 해’ 사업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있어 일본은 아직 미래라기보다는 과거이며, 혐오와 극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광복 20주년을 맞으며 한국은 그런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감행했다. 영원히 등을 돌리고 싶었던 일본과 함께 번영과 평화, 화해와 협력을 40년간 의논해 왔다. 지금은 우정이라는 새로운 시험대 앞에 섰다.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한 2005년이다.
우선 우리의 자각(自覺)이 필요하다. 항일(抗日)-극일(克日)-협일(協日)로 이어져 온 대일관계를 우일(友日)로까지 발전시켜야 할 역사적 책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3·1선열들은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 일본의 자성보다 우리의 운명 개척과 독창력 발휘가 훨씬 더 중요했다. 정의·인도·생존·존영의 기치 아래 독립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는 것이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와 협력하는 길이라고 선언했다. 묵은 원한에서 벗어나 자유정신을 발휘했던 선열들의 자각은 한일 우정의 출발점이다.
양국 관계가 새 출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각성(覺醒)은 필수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처럼 최소한의 윤리조차 없이 만행을 자행한 경우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배타적 감정은 필연적이었으며,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사과나 과거를 합리화하는 망언은 한국인의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래서는 아무리 다양한 학술·문화·교류 행사를 하더라도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마음이 통하지 않고선 ‘백약이 무효’임을 일본은 인식해야 한다. 우정의 동반자가 되기 위한 일본의 성숙한 자세가 필요한 때다.
국내적으로는 관용(寬容)이 절실하다. 1945년 이후 독립한 대부분의 국가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내외를 맴돌며 기아와 빈곤 속에 허덕이는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대를 바라보게 됐다. 물론 이런 급속한 성장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과거 청산의 노력도 미흡했다. 그렇다고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의 양극과 모순을 파헤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관용과 여유로 현실의 양면을 직시하는 것이 또 다른 대립과 분열을 방지하는 지름길이다. 역사를 통전적(統全的)으로 바라보는 사심(史心)이 있어야 할 때다.
광복 60주년이자 한일수교 40주년인 올해는 ‘한일 우정의 해’이기도 하다. 사진은 1965년 12월 서울에서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이 한일협정비준서를 교환하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바야흐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한국 일본 중국 인도를 지칭하는 ‘투 더블유(WW) 경제권’의 도래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 2020년대에 펼쳐질 이 미래사회가 기미독립선언의 예측대로 상생 글로벌 평화 행복의 사회가 되느냐 못되느냐는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달렸다. 한일 양국이 진실된 마음으로 과거를 직시하고 우정의 마음으로 미래를 공유한다면 양국 관계의 진전은 물론 중국 인도 ASEAN까지 포함된 범(汎)아시아 경제권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3·1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이원범 삼일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