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즈데이 북/코니 윌리스 지음·최용준 옮김/824쪽·1만3500원·열린책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2054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영국 옥스퍼드대의 중세학도 키브린은 1320년으로 향하는 시간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의 총명함을 아끼는 던워디 교수는 마녀 사냥꾼과 갖가지 질병들이 널려있는 위험한 중세로 그녀가 떠나가는 것이 불만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여행은 야심만만한 학장 대리 킬크리스트가 밀어붙이는 것이라 제대로 반기를 들지도 못한다. 결국 위험은 현실로 나타난다. 키브린은 기술적 장애로 1320년이 아니라 페스트가 만연하던 1348년의 옥스퍼드로 보내진 것이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이 책 ‘둠즈데이 북’의 도입부다. 저자인 미국 여성 작가 코니 윌리스(60)는 미 과학소설(SF)의 양대 권위를 이루는 두 상(賞)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각각 8회, 6회 수상했다. 미 SF계의 최고 기록이다. 그녀의 화려한 이력은 1992년 ‘둠즈데이 북’으로 이 두 상은 물론 로커스상까지 받음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둠즈데이 북’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SF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학적 사고를 밑바탕에 둔 채 사실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중세 영국의 생생한 생활상과 페스트에 맞선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가 실감나게 재현된다. ‘시간여행’은 이야기의 큰 장치로만 사용되며 엄격한 인과규칙이 적용돼 현재의 인물들이 과거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SF이면서도 본격소설의 특장을 보이는 이 소설은 탈(脫)장르적 상상력의 ‘경계소설(slipstream)’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로 보내진 키브린은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 알아둬야 할 ‘랑데부’ 장소를 찾아내지 못한 채 페스트에 걸리게 된다. 한편 현재의 옥스퍼드 역시 페스트에 걸린 채 과거로부터 귀환해 온 시간여행 기술자 때문에 환자들이 속출하게 된다. 질병이 시간을 가로질러 전염된 것이다. 결국 던워디 교수만이 키브린을 구해내야겠다는 각오를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위트 넘치는 문장들, 짧고 빠른 대화, 독자들의 궁금증이 일게끔 정보 공급을 조절하는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하다. 시간여행, 기술의 오류, 14세기 중세를 연구하는 학자들, 돌아갈 길을 잃은 시간여행자, 중세 영주의 집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페스트의 발병 같은 요소들은 뒷날에 나온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 ‘타임 라인’(1999년)을 떠올리게 한다.
‘둠즈데이 북’은 주인공 키브린이 중세 관찰기를 녹음하기 위해 손목뼈에 이식한 녹음기의 이름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