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작가,
타국에서 설날을 맞았습니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여행길에도 제사와 차례짐을 지고 다닙니다. ‘조율이시(棗栗梨枾)’ ‘어동육서(魚東肉西)’의 배열이야 흐트러질 수밖에 없지만 내 가느다란 뿌리가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신년’으로 불리지요. 철도의 건설과 탄광의 채굴에 투입하기 위해 동원된 ‘쿠리(苦力)’들의 서러운 역사 내음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연전에 국내에서 출판된 ‘권력과 달력’이라는 책을 기억합니다. 모든 권력자는 자신의 달력을 만들어 강요하는 것이 권력의 근본 속성이라는 요지였지요. 그럴수록 강요당하는 사람은 저항하지요. 그러고 보니 세상의 모든 소수자 문제가 달력과 연관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의 장면들이 어른거립니다. 망해 가는 나라를 등지고 온 백성이 새 나라를 세울 꿈을 꾸지요. 머릿속 깊숙이 박힌 조선의 일력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제 캘리포니아에서 아시아인은 소수자가 아닙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를 필두로 캘리포니아의 주립대들에는 아시아계 학생이 45%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아시아 국가의 상징으로서 중국의 힘은 여기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주말에 ‘슈퍼 볼’이라는 전 미국인이 열광하는 축제가 열렸지요.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는 좀도둑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도 경기를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성스러운 시간에 영업하는 도둑은 그 세계에서도 매장된다나요?
미식축구란 정말 격렬한 경기지요. 그것은 바로 피의 정복으로 이어진 미국사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한 시대의 경전이었던 루이스(R W B Lewis)의 ‘아메리칸 아담’(1955년)이라는 비평서가 있었지요. 미국인은 스스로 창조자가 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조상과 선생이 없는 아메리카의 아담은 모든 것을 자신의 권한과 책임 아래 두는 습관과 철학에 산다는 것이지요.
순진도, 무식도, 거침도, 침략전쟁까지도 모두 자신의 몫입니다. 그런데 미국인 자신들끼리는 법과 함께 사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존 그리셤의 또 다른 법률소설, ‘마지막 배심원’이 여전히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부시 정부의 법무부 고위직에 몸담았던 한국계 법학자가 쓴 메모가 지식인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전쟁 중 포로의 심문에서는 헌법상 권리도 잠시 멈춘다는 요지였지요. 나와 너, 친구와 적을 준별하는 그에게서 아메리카인의 철학을 확인합니다. 그가 우리의 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한국인이기를 바라는 기대는 그에게는 너무나 가혹할지 모릅니다. 뿌리가 어디든, 출발지가 어디든 아메리카라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인종이 창조된다는 해묵은 격언이 되살아납니다. 그 미국의 힘이 불러들일 재앙이 두렵습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 로스쿨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