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소극장 연극공연. 당시 연극인들은 정권에 의한 검열과 공연중지가 잇따랐지만 열정 하나로 ‘판’을 이어나갔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대학교 2학년 봄날이었다. 우연히 친구 따라 간 소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연출하던 선배가 갑자기 “너 나와서 대본 좀 읽어라” 하기에 난생 처음 대본이라는 것을 읽었다. “너 내일부터 계속 나와!” 하는 통에 엉겁결에 서울대 사범대 연극반원이 되고 말았다.
‘선우교수댁’이라는 그 연극은 전투경찰인 큰아들과 데모하는 대학생인 작은아들로 인해 벌어지는 교수 집안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었고, 나는 작은아들을 심문하는 정보과장 역할이었다. 학교에서 공연 허가가 안 나와 기독교회관에서 공연 준비를 하던 중, 진짜 전투경찰이 들이닥쳐 건물을 폐쇄하고 무대를 철거해 버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서 소주를 마시며 울분을 토하던 그날 이후, 내 인생은 180도 바뀌어 버렸다.
나는 연극반실을 숙소 삼아 연극에 미쳐서 살았다. 치기만만하지만 순수하고 열정에 가득 찼던 광란과 기행의 나날들. 내성적이고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는 점점 연극에 미친 술꾼 대학생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친구들이나 교수님들은 그런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사랑해 주었다.
수업에 들어가지도 않는 나에게 교수님들은 낙제 점수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연할 때 의상으로 쓰라고 낡은 양복과 옷가지도 가져다 주었고, 학비가 없어 등록을 못하게 되자 장학생으로 학비 면제해 주는 혜택까지 베풀어 주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다.
대학 졸업 후 독일어 교사를 하던 시절 교사극단 ‘상황’에서 연극을 하게 됐는데, 그 극단의 대표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단체가 해산되고 몇 명은 구속되었다. 그 사건은 ‘선우교수댁’ 사건과 연결되어 연극과 사회, 예술과 역사 등의 문제에 대한 심각한 화두를 던져 주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만 하면서 지냈다. 모든 사회의 가치가 정치와 경제 활동에 치우쳐 있던 1970, 80년대에 연극을 한다는 것은 굶주림과 고독을 의미했다. 그 중에서도 마당극, 민족극을 한다는 것은 불온분자, 빨갱이와 동의어로 취급되던 시절인지라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온갖 토론과 논쟁, 검열과 공연 중지, 극단 등록 취소 등 갖가지 유·무형적 제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악조건 아래서 나는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마치 인생을 건 도박처럼 연극을 했다. 돌이켜보면 암울하고 지독히도 고통에 가득 찼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를 지탱해 주었던 건 ‘질풍노도’와 같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을 함께 나누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게 젊음을 불태웠던 동시대 동료들의 힘이었다.
○ 김명곤 씨는…
1952년 전주 출생. 서울대 사범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와 고교 교사를 지낸 뒤 연극활동에 몰두했다. ‘장사의 꿈’ ‘아리랑’ 등에 출연했고 ‘어머니’ ‘백범 김구’ 등을 연출했으며, ‘서편제’ 등 영화와 TV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와 우석대 전임강사, 극단 아리랑 대표,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