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들’ 백윤식
중견 탤런트들이 스크린 전면에 나서고 있다. 젊은 주연배우를 뒷받침해주는 조연이나 ‘맛보기’ 웃음을 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중견 탤런트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견배우 신드롬의 선봉에 선 배우는 백윤식(58). 그는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사태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3일 개봉)에서 박 대통령을 살해하는 ‘김 부장’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백윤식이 스크린에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2003년. 그해 SF 코미디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해 지구에 잠입한 외계인 ‘강 사장’ 역할로 충격파를 던진 그는 이듬해 숨 막힐 정도로 꽉 짜인 범죄 스릴러 ‘범죄의 재구성’에서 전설적인 사기꾼 대부 ‘김 선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캐릭터로 각광받은 그는 이후 젊은층 사이에 ‘신사적이고 엽기적인 배우’로 자리매김하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광고 모델로 출연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다음달 11일 개봉예정인 코미디 영화 ‘마파도’는 중견 여배우들로 승부를 건다. 여운계(65) 김을동(60) 김수미(54) 김형자(55)가 ‘마파도’라는 수상한 섬에 사는 ‘엽기 할머니’들을 연기하는 것. 이들은 마파도를 찾은 두 명의 건달(이정진 이문식)을 혼내준다. 이들이 일자 단발머리 가발에 주홍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낫을 든 채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뜨고 못 볼’ 이 영화 포스터는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인어공주’에서 억척스러운 때밀이 엄마 역으로 심금을 울린 고두심(54)은 올봄 개봉할 영화 ‘엄마’에서 다시 한번 눈물겨운 연기를 선보일 예정. ‘엄마’는 어지럼증 때문에 28년간 차를 타지 않은 68세 어머니(고두심)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200리를 걸어가면서 겪는 3박 4일을 그렸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말아톤’을 통해 23년 만에 ‘주연급 조연’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보인 김미숙(46)은 자폐증을 앓는 아들 초원(조승우)에게 강하고 뜨거운 사랑을 쏟는 어머니 역할을 맡아 감동을 줬다. 이 영화는 20일 전국 관객 350만 명을 넘어서면서 누적관객 수에서 ‘공공의 적 2’를 제치고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코믹액션 ‘까불지마’는 젊은 주연급 배우를 일절 배제하고 중년배우 셋을 전면에 내세워 승부한 ‘용감한’ 영화. 탤런트 오지명(66)이 감독 데뷔한 이 영화는 오지명 최불암(65) 노주현(59) 등 연기파 중견 탤런트 세 명이 각각 개떡, 벽돌, 삼복이란 이름의 ‘원로 주먹’으로 출연해 좌충우돌 연기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지방에서 저력을 보여 전국 관객 45만 명을 끌어들이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중년 배우들을 얼굴로 내세운 영화가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2004년 3월 개봉한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주현(64), 송재호(66), 양택조(66), 김무생(62), 선우용녀(60), 박영규(51) 등 중견 6명을 진희경과 함께 공동주연으로 내세웠지만 흥행에 참패했다.
이는 여전히 영화의 흥행 여부를 결정하는 관객층이 20대에 집중돼 있기 때문. 20대 관객은 중견 배우들이 기존의 이미지를 보이면 “TV와 똑같다”며 식상해 하고, 기존 이미지를 뒤집어 엽기적인 연기를 선보이면 “작위적이고 유치하다”며 외면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제작사들의 고민. 제작사들은 중견 배우들을 인기 있는 젊은 배우와 파트너로 묶어 등장시킴으로써 리스크를 줄이고 있다.
영화평론가 황영미 씨는 “중견배우들의 등장은 관객의 요구에서 시작됐다기보다는 주연급 젊은 배우들의 개런티가 천정부지로 솟은 열악한 국내 영화제작 환경의 산물”이라며 “제작사는 상대적으로 낮은 개런티에 검증된 연기력을 가진 중견배우에게 기대게 되고 관객들은 이들의 연기를 스크린에서 집중도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