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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상/추억을 찾아서]황당한 가위질의 역사

입력 | 2005-02-22 16:14:00

‘제5원소’


최근 개봉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법원으로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일부 장면 삭제 결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장면이 삭제된 채 개봉된 영화들이 많았다. 검열, 일명 가위질은 군사정부 시대 때는 언론의 비판적 기사나 영상물 등을 검열하는 데 쓰였다지만 이후에도 ‘폭력적이어서’, ‘외설적이어서’, ‘시대 비판적이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영화들이 가위질을 당했다. 심지어는 상영시간이 길면 상영 횟수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자체 가위질이 자행되기도 했다.

나운규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강점기에 검열로 일부 장면이 삭제됐고,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변했던 최인호 원작,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30분가량이 잘려나간 채 극장에 걸려야만 했다. 유지인 주연의 ‘도시로 간 처녀’(1981년 작)는 버스안내양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중광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중광의 허튼소리’(1986년 작)는 불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여 군데 장면이 가위질당했다. 두 영화를 만든 김수용 감독은 검열에 대한 항의표시로 은퇴선언을 하기도 해 영화계에 파문이 일었다.

한편 1970년대 하이틴영화 ‘진짜 진짜 미안해’는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심의가 반려되자 제작사가 문제의 장면을 자진 삭제해 영화관에 내걸었다.

외화는 더욱 심하게 가위질을 당했는데, 그 이유가 한국영화와는 달랐다. 상영 횟수를 늘리기 위해 자르기도 하고, 영화의 내용이 어려워서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친절한(?) 생각에 관계자들이 알아서 가위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로버트 드 니로, 제임스 우즈 주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년 작)는 원래 3시간 47분이었던 내용에서 1시간 이상을 잘라내 영화의 앞뒤가 전혀 안 이어지기도 했다. 1950년대 미국 뉴욕 브루클린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운동과 밑바닥 인생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90년 작)는 지루하다고 판단되는 장면은 모두 잘라내서 그저 야한 삼류영화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다. ‘리플리’(1999년 작)는 상영 횟수 때문에 20분 이상을 잘라내 개봉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제5원소’(1997년 작)의 개봉으로 내한했던 뤽 베송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일부가 잘린 사실을 기자회견장에서 알고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잔뜩 화가 나서 돌아갔다. 이 웃지 못할 일화는 가위질에 대한 국내영화계의 인식을 새롭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이야 상영등급제로 가위질에 대한 논란이 거의 사라졌지만 터무니없는 가위질은 만든 사람, 보는 사람 모두에게 유쾌할 리 없을 것이다. 영화의 판단은 관객의 몫이니까.

채윤희·올댓시네마 대표 uni1107@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