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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2-23 18:30:00

그림 박순철


옹왕 장함이 죽고 폐구(廢丘)가 떨어지자 한왕은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를 사로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봉국(封國)을 폐지했다. 옹(雍)땅에 중지(中地) 북지(北地) 농서((농,롱)西) 세 군(郡)을 두고 관원을 보내 직접 다스리기로 했다. 그리고 폐구는 이름을 괴리(槐里)로 바꾼 뒤 성을 허물어버렸다.

한왕은 어렵게 평정한 옹 땅을 잠시 돌아보고 어지러운 민심을 달랜 뒤 군사를 돌려 역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한 어려움이 다시 한왕을 괴롭혔다. 그해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있어 관중(關中)에 크게 흉년이 든 일이 그랬다.

승상 소하가 어찌 변통해보려 했으나, 그러잖아도 잇따른 전쟁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데다 계절은 추수를 앞둔 초가을로 접어들 때라 남은 곡식이 없었다. 쌀값이 치솟아 1만 전(錢)을 내야 쌀 한 섬[斛]을 살 수 있을 지경이 되니, 여기저기 굶어죽는 백성들이 생겼다. 이에 한왕은 어쩔 수 없이 관중의 백성들을 촉(蜀)과 한중(漢中) 땅으로 옮겨 그곳 곡식을 먹게 하였다.

가을걷이가 시작되어 많건 적건 들판의 곡식을 거두게 되면서 기근이 조금 풀리었다. 그러나 10만이 넘는 대군과 조정 관원들을 먹이기에는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거기다가 한왕이 관중에 안주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왕께서 정녕코 천하를 다투어 보시려는 뜻이 있다면 이대로 관중에 머물러 계셔서는 아니 됩니다. 관동으로 뻗어나간 기세를 살리시어 형양을 근거로 삼으시고 패왕과 맞서셔야만 넓고 기름진 서초(西楚)를 차지하고서도 동서남북으로 대군을 내어 천하를 호령하는 패왕과 쟁패(爭覇)의 형국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형양에 눌러앉아 오창(敖倉)의 곡식을 먹으며 광무산(廣武山)과 성고(成皐)를 앞뒤 성벽 삼아 패왕의 서진(西進)을 막으십시오. 지금 대등한 기세로 항왕과 맞서지 않으시면, 힘에 눌린 제후들은 모두 항왕을 섬기게 되어 종당에는 대왕의 관중만 외롭게 남게 될 것입니다.”

관중의 헤아림 깊은 선비로부터 그 같은 진언을 듣자 한왕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나가 형양에 자리 잡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러나 관중을 떠나는 한왕의 마음가짐은 여섯 달 전과 아주 달랐다.

한왕은 태자 영(盈)을 도읍인 역양((력,역)陽)에 남기고, 승상 소하로 하여금 태자를 보살피며 관중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다시 조참에게 3만 군사를 주며 대리 좌승상(左丞相)으로서 소하의 뒤를 받쳐주게 했다.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태자가 뒤를 이어 한나라는 지켜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지난날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관중의 민심을 샀던 한왕답지 않게 한나라의 법령과 규약도 한 번 더 정비했다. 자신이 관중을 비워도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함이었다. 또 기근으로 쪼들리는 나라살림에도 종묘와 사직을 새로 고치고 궁궐을 손보아 왕실의 위엄을 지키려 애썼다. 현읍(縣邑)을 명확히 가르고, 관중의 호구(戶口)와 전조(轉漕) 조병(調兵) 급군(給軍)에 관한 것들을 면밀히 헤아려 관동에서의 쓰임에 모자람 없이 댈 수 있게 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하여 그 모든 일이 대강 매듭지어지자 한왕은 5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함곡관을 나갔다. 한(漢) 2년 가을 8월 하순의 일이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