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항왕이 힘써 형양을 치지 않은 것은 하늘이 우리 한나라를 도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소. 과인은 이 틈에 동북으로 나가 우리 근거를 넓히고 등 뒤를 든든히 하고 싶소. 위표(魏豹)를 다시 불러들이고 조나라와 연나라, 제나라를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가 항왕을 두려워할 까닭이 어디 있겠소? 항왕이 넓고 기름진 서초(西楚)뿐만 아니라 구강(九江)과 임강(臨江) 형산(衡山)을 다 끌어내 몰고 온다 해도 넉넉히 맞설 수 있을 것이오.”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자 한왕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관중을 나올 때 들은 말도 있고, 패왕이 선뜻 밀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데 자신도 생겨 한번 큰소리 쳐본 셈이었다. 하지만 그때로는 천하를 양분하는 자못 웅대한 구상이었다. 그러자 역이기가 나서서 말했다.
“위왕 표(豹)는 원래 스스로 우리 한나라를 찾아와 항복하였고, 팽성에서도 대왕의 한 팔이 되어 싸웠습니다. 수수(휴水)의 사지를 벗어날 때도 우리와 함께였는데, 갑자기 마음이 변해 항왕에게로 돌아가 버렸으니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군사를 내기 전에 먼저 신을 보내주시면, 가서 그 까닭을 알아보고 위왕을 달래 다시 우리 편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장량도 옆에서 역이기를 거들었다.
“만약 역((력,역))선생이 위왕을 달랠 수만 있으면 대왕께서는 화살 한 대 허비하지 않고 위나라를 되찾는 셈이 되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나서지는 않아도 한신 또한 말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에 한왕은 그 자리에서 역이기를 사신으로 삼아 위나라로 보냈다.
“그대가 위표를 잘 달래 다시 과인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면 과인은 그대를 만호후(萬戶侯)로 봉하겠소!”
한왕의 그 같은 당부를 받은 역이기는 날을 끌지 않고 형양을 떠나 위왕 표가 도읍을 삼고 있는 안읍(安邑)으로 달려갔다.
이때 위왕 표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한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하수(河水) 나루를 끊는 한편, 10만 군사를 긁어모아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나라에서 역이기가 사신으로 왔다는 말을 듣자 차게 웃으며 말했다.
“역가 성 쓰는 늙은이가 왔다면 옛날 진류(陳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객(說客)으로 왔겠구나. 만나줄 것도 없이 매질해 내쫓아야 하나, 그래도 한때 한솥밥을 먹은 인연이 있으니 무어라고 하는지 수작이나 들어보자.”
그런 다음 역이기를 불러들이게 했다. 역이기는 위왕 표에게 예를 올리기 바쁘게 돌아오기를 간곡히 바라는 한왕의 뜻을 전했다. 위표가 비웃으며 받았다.
“사람의 한살이는 내닫는 백마가 작은 틈 사이를 지나쳐 가는 것처럼이나 짧고 덧없는 것이오. 그런 한살이를 무엇 때문에 남에게 얽매여 종노릇하며 살겠소? 그런데 한왕은 사람됨이 거만할 뿐만 아니라 남을 자주 욕보이고, 제후와 신하들을 꾸짖기를 마치 종 나무라듯 하고 있소. 윗사람의 품위도 갖추지 못하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절도 없으니 어떻게 그를 섬길 수 있겠소? 선생께서 무슨 말로 달래든 나는 차마 그 꼴을 다시 볼 수 없소!”
그리고는 역이기의 말을 더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