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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남경주와 한강스케이트장

입력 | 2005-02-27 18:34:00

매서운 추위로 종종 한강이 얼어붙곤 했던 1970년대.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오락 중 하나는 스케이트였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후반엔 요즘보다 겨울이 더 길고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 겨울 오락거리라고는 축구, 자치기, 팽이치기, 썰매 타기, 롤러스케이트 타기, 그리고 스케이트 타기 정도였던 것 같다. 그중 롤러장과 스케이트장이 단연 인기였다. 그 이유(!)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스케이트는 부유한 친구들이 즐겼는데 당시 스케이트를 빌리지 않고 구입해서 탄다는 건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스케이트를 구입할 형편이 안 됐던 나는 언제나 빌려 탈 수밖에 없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살던 나는 제1한강교 다리 가운데 양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중지도’라는 곳에 있는 스케이트장에 다니곤 했다. 그곳까지 갈 교통수단이 없어 항상 걸어 다녔지만, 그래도 그곳에 가면 예쁜 여학생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항상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롤러장에서 정말 예쁜 애를 만났다는 친구들의 무용담을 듣고 부러워했던 나에게 어느 날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하얀 스케이트장을 더 눈부시게 할 정도로 예쁜 여학생이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 여학생 곁으로 달려가서 잽싸게 손을 내밀었다.

“저, 처음 타시나 봐요?”라고 말을 건네는 내게 그 여학생은 “네, 처음 타는 건데 잘 안 되네요”라고 답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Yes!’를 수백 번은 더 외쳤다.

그렇게 우린 하루 종일 땀이 날 정도로 스케이트를 탔고 다음날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들뜬 마음으로 밤을 거의 꼬박 새운 나는 다음날 문도 열기 전에 스케이트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그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후쯤 전날 함께 왔던 여학생의 친구가 편지만 한 통 전해 주고 가버렸다.

“미안해. 어제 너무 재미있어서 무리했나 봐. 밤새 몹시 아파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됐어. 난 원래 부모님이랑 일본에 살고 있어. 몸이 좋지 않아 방학 동안 효창동 할머니 댁에 요양차 와 있는 거야. 돌아가면 큰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몸이 괜찮아져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날 이후 나는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자청해 스케이트 날도 갈아주며 스케이트장에서 일했다. 그 여학생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방학 내내 그 길고 추운 한강다리를 걸어서 왔다 갔다 했건만 끝내 그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중지도에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곳에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멋진 극장이 들어서고 내가 그곳에서 공연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그 시절 가슴 시리도록 아련한 추억이 무대에 설 때마다 떠오르겠지.

○ 배우 남경주는…

△1964년생 △1984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졸업 △1982년 연극 ‘보이체크’로 데뷔 △‘그리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렌트’ ‘갬블러’ ‘크레이지 포 유’ 등 뮤지컬 50여 편 출연. △백상예술대상 인기상,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 인기스타상 등 수상 △현재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 출연 중 △뮤지컬 전문학원 ‘남아카데미’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