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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최진규]인문계고교에 직업과정 신설을

입력 | 2005-03-01 18:41:00


올해 중학교 입학을 하는 큰아이를 위해 작년 여름 큰맘 먹고 성능 좋은 컴퓨터를 한 대 구입했다.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EBS 교육방송을 규칙적으로 시청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컴퓨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어 서비스센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담당 직원이 도착했다. 간단히 수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안내하려는 순간, 갑자기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선생님’ 소리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5년 전쯤 졸업한 제자였다.

녀석은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 오로지 컴퓨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녀석처럼 유별난(?) 학생들을 지원해줄 교육프로그램도 없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긴 했어도 입학원서는 한 곳도 제출하지 않았다. 졸업과 함께 녀석은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모두 대학 진학에만 매달리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는 지적이 많다. 학생들이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인문계 고교에도 직업교육 과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광주전자공고 학생들이 전자기기 작동 실습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컴퓨터를 수리하는 것보다 녀석의 후일담이 더 궁금했다. 녀석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컴퓨터 판매업을 하는 친척의 매장에서 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컴퓨터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다녀온 후, 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원에 입소해 1년 남짓 기술 교육을 받은 뒤 이곳 서비스센터로 배치됐다고 한다.

녀석은 어차피 학교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자신의 일을 찾기로 결심했다며,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같은 반 동료들 가운데 주위의 기대를 온몸에 받으며 명문대학에 진학했던 친구들도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는 말도 곁들였다.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이 스위스 한 연구소의 보고서를 인용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조사 대상 30개국 중 한국의 고학력자 비중은 3위로 나타났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대학졸업자는 사회적 비용도 문제지만 국가경쟁력에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성공의 통로로 인문계 고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능사로 여긴 결과다.

그렇다고 인문계 고교의 비중을 당장 줄일 수도 없을 것이니 일단 인문계 고교에도 직업과정을 신설해 학생들이 미리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교육 선진국에서도 고교마다 반드시 직업과정을 갖추고 있어 학문에 관심 있는 일부 학생만 대학에 진학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취미와 적성에 따라 취업준비를 한다.

우리처럼 인문계 고교생들이 대학 진학에만 매달리는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장 난 컴퓨터는 제자의 손길을 거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원래의 기능으로 돌아갔다. 그 제자에게 늦었지만 정말 잘했다는 칭찬의 말을 건넸다. 오로지 그 자신의 능력과 의지만으로 일군 결과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리 교육도 대학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최진규 충남 서령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