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작가, 서울의 봄소식 고맙습니다.
대학 교정은 떠나고 새로 드는 젊은 발자국들로 붐비겠지요. 우리 젊은이들의 유별난 역동성이 여기서도 느껴질 듯합니다. 내가 머무르는 이곳에도 봄기운이 은근합니다.
사실은 이미 짧은 봄방학 중이지요. 우리나라의 겨울방학이 길게 된 것은 아마도 추위 때문이었겠지요.
‘정원 캠퍼스’라는 별명을 가진 이 학교의 전경은 지극히 단아합니다. 여러 품종의 상록수를 호위병으로 하여 매화와 벚꽃, 그리고 자목련도 봉오리를 열었어요. 그런데 아쉬운 것은 미국 땅에는 아지랑이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지랑이는 산야가 아기자기하고 사람들 가슴에 품은 한도 결코 노골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에 고유한 것이 아닐까, 자연과학에 지극히 무식한 생각도 해 봅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역사소설’에 힘 쏟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역사는 기억과 기록만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가 아니겠어요. 역사소설은 ‘창조적 기억’이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정 작가를 그처럼 사로잡은 동갑내기(?) 샨사의 ‘측천무후’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그녀의 다른 작품 ‘바둑 두는 여자’를 읽고 며칠 동안 주위에 공감을 강요한 적이 있지요.
가로 세로 열아홉 줄, 삼백육십한 점의 조합을 비집고 좁은 통로, 미세한 공간을 차지하려 벌이는 싸움은 인생과 역사의 축도입니다. 신분을 감춘 일본군 정보장교와 중국인 처녀가 바둑판이라는 중립전선에서 벌이는 역사와 애정의 복합 심리전은 일품이었지요.
그러기에 소설의 다소 진부한 끝내기 처리를 덮어줄 수 있었어요.
정이현 작가,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의 뜨거운 역사의식에 은근한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를 너무 짧게, 그리고 끊어서 보려는 것 같아요. 그들의 순수한 열기 뒤에는 정치가들의 숨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언제나 현실을 전쟁터로 삼아야 하는 정치인의 강박관념에 휩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여배우의 자살소식에 온 나라 ‘누리꾼’들이 분탕을 치고 대통령을 꿈꾼다는 정치인까지도 ‘역사적’ 평가를 내리더군요. 그냥 개인의 비극으로 덮어두어야 할 일 같은데 말이죠.
정 작가를 압도한 중국 작가의 역량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저 개인적 재능일까요? 나는 달리 생각합니다. 샨사만이 아닙니다. 비슷한 무게를 지닌 수많은 작가들이 총림(叢林)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요?
그들의 역량은 유불선(儒佛仙), 시서부(詩書賦), 성(聖)과 속(俗)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적유산에 힘입은 것은 아닐까요? 그 위에 역사란 분별없는 일시적 열정이 불러들이는 잔혹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임을 믿는 대륙인의 사관이 버팀목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정이현 작가, 봄바람을 타고 짧은 여행을 떠나렵니다. 미국보다, 중국보다, 그리고 우리보다 작은 나라로. 그 작고 외진 곳에는 혹시 아지랑이가 있을까 눈여겨보겠습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 로스쿨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