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운명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18년 전 친구가 소설 번역 일을 맡아 놓고 바빠지자 도움을 청하기에, 시리즈 중 두어 권을 맡아 번역했고 그 소설이 공동 번역으로 출간됐다.
책 표지에 내 이름이 박힌 게 신기했고, 그 책이 대형 서점에 진열된 것은 더욱 신기했다. 어찌어찌 해서 그 책이 어느 출판사에 전해져 출판사와 손이 닿았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 저작권 협약이 처음 발효되었고, 그 출판사는 유명 작가인 시드니 셸던 작 ‘시간의 모래밭’의 저작권 계약을 따낸 터였다. 출판계에서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하고 번역서를 펴낸 거의 첫 케이스였다고 기억한다. 출판사는 내게 번역을 맡겼다. 나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런 시점에 데뷔했으니 억세게 운이 좋았다.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번역한 ‘시간의 모래밭’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신문에 광고도 났다. 서점에 나가면 내가 번역한 책이 쉽게 눈에 띄고 읽은 사람도 많아지니, 칭찬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흥분될 수밖에…. 사실 번역이 뭔지 몰랐고, 번역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이 큰일부터 치른 셈이었다.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혼자 영어 문장을 들여다봐야 하는 게 싫어 더 공부할 생각은 접은 터였다. 복잡한 세상을 누비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신나게 일하는 게 적성이라고 생각했건만,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늘 혼자니 어찌 이런 일이….
계속 책을 출판하게 됐고, 머릿속으로 영화 찍듯 풀어 가는 번역 작업도 재미있었다. 한데 그 시절 직업을 말할 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단번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번역은 대학원생이 하는 아르바이트라는 편견이 퍼져 있던 시절이라,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을 부르는 이렇다 할 명칭도 없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데다 그럴듯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명함을 만들려는데 ‘번역자’ ‘번역가’ ‘전문 번역가’ 등등 모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번역작가’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작가’란 말이 분위기 있다나. 사족을 붙이자면 번역은 ‘제2의 창작’ 어쩌고 그런 거고. 어쨌든 그 후로 딸아이의 가정환경 조사서나 출입국 신고서 따위의 직업란에 망설임 없이 번역작가라고 쓴다. 요즘은 그게 뭐하는 일이냐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흐뭇하다.
얼마 전 병든 딸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옮겼다. 딸과 작별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일손을 놓고 목 놓아 울어 버렸다. 그리고 며칠 몸살을 앓았다. 그 딸을 같이 떠나보내느라 그랬을까. 감정이입이 잘되는 작품을 번역할 때면 마음이 힘들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일하는 재미이고, 계속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이 직업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면 “운명”이라고 대답한다. 또 “이 일의 좋은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만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어디서든 작업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고 덧붙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약력▼
1965년생.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성균관대 겸임교수를 지냈고 서울여대 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대표 번역 작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 등.
공경희 번역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