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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김별아 ‘식모 언니의 추억’

입력 | 2005-03-06 18:28:00

옥자, 미자, 금자…. 그 엇비슷한 이름을 가진 십대 소녀들에게서 수많은 놀이와 글자와 세상을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뿌연 유년의 기억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추억 갈피갈피마다 그녀들의 얼굴이 묻어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와 남동생의 생일은 공통적으로 한 달의 마지막 날이다. 30여 년 전, 1개월의 짧은 산후휴가에도 전전긍긍 관리자의 눈치를 봐야 했던 엄마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기어코 월말정리를 마치고 돌아와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학교로 돌아가야 했던 엄마 덕택에 나는 생후 1개월부터 남의 손을 전전하며 자라났다. 외할머니와 할머니 등 집안의 여성 인력이 총동원되기도 했으나, 가장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나를 기른 손길은 다름 아닌 식모 언니들이었다.

옥자, 미자, 금자…. 나는 그 엇비슷한 이름을 가진 십대 소녀들에게서 수많은 놀이와 글자와 세상을 배웠다. 지금도 뿌연 유년의 기억 속에서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추억 갈피갈피마다 그녀들의 얼굴이 묻어난다.

가난하고 형제 많은 집의 딸로 태어나 제대로 학업도 마치지 못한 채 입 하나 덜기 위해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던 그녀들은 애보기와 가사노동의 무료한 일상을 견디기에는 너무 어리고 발랄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금자 언니는 그때 마침 어딘가에서 눈이 맞은 사내와 연애 중이었다. 들썽들썽 마음이 흔들려 더더욱 자신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했던 금자 언니는,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다 팔아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나는 알리바이 입증자, 혹은 공범으로 적극 동원되었다.

금자 언니는 내 손목을 끌고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제과점으로 갔다. 우리가 들어서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장발의 사내 하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금자 언니는 내게 요구르트와 단팥빵을 사주었고, 자기는 사내와 머리를 맞댄 채 팥빙수를 먹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살금살금 엿들으며 ‘앙꼬’가 듬뿍 든 단팥빵을 미어져라 입안에 쑤셔 넣었다. 빵 값은 금자 언니가 냈다. 먼저 빵집을 나선 사내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휙휙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결국 엄마가 쌀독이 비는 것을 눈치 채면서 위태로운 연애 놀음도, 금자 언니의 식모살이도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건달 같은 사내의 시답잖은 농담에도 까르륵 깔깔, 한껏 교태 어린 웃음을 흩뿌리던 금자 언니의 붉은 뺨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성장의 그늘 아래 숨은 저임금의 여성노동 착취를 말하기 이전에, 나는 그 이름 그대로 나의 ‘밥 어머니’가 되어 주었던 어린 그녀들이 그립고 안타깝다.

얼마 전 엄마가 우연히 길에서 금자 언니를 만났다는데, 예전의 달덩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세파에 시달려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중년 아낙이 한동안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의 손을 놓지 못했다 한다. 부디 어디서든 행복해주길, 신산한 시절을 견뎌온 그녀들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김별아 씨는…

1969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실천문학’에 중편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로 등단했다. 작품으로 ‘꿈의 부족’, ‘개인적 체험’,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축구전쟁’ 등이 있다. 최근 장편소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 김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