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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칼럼]자녀들에게 국제정치학을

입력 | 2005-03-07 18:03:00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정치학자에게 “청소년용 국제정치학 책을 한 권 써 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5, 6학년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국제정치의 기본 용어나 개념들을 쉽게 풀어서 소개하면 의미도 있고 책도 잘 팔릴 듯해서였다.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가 만화 형식을 빌려 쓴 세계 역사기행 ‘먼 나라 이웃 나라’는 지난 18년간 우리 아이들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면서 1000만 권 이상 팔렸다.

국제정치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의외로 낮다. 4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려면 눈과 귀가 언제나 밖을 향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입으로는 세계화를 외치지만 관심은 늘 안에 갇혀 있다. 반세기 가까이 미소(美蘇) 양극체제 아래서 살아오면서, 미국과의 관계만 좋으면 굳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타성 때문일까.

▼4강 틈바구니서 살아가려면▼

냉전 종식과 함께 우리 외교의 지평도 확대됐지만 다수 국민의 국제적 인식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2년 전 동아일보는 한국국제협렵단(KOICA)과 함께 ‘한국인의 국제인지도’를 처음 조사한 적이 있다. 20세 이상 남녀 1500여 명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했는데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한국이 일부 개발도상국을 무상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응답자가 50%를 넘었다. 유럽연합(EU)의 본부가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다고 맞힌 사람은 10%에 그쳤다. 교역량으로 따져 세계 10대 경제대국이고,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자랑하는 디지털 강국이라지만 ‘국제문제에 대한 기초지식’의 현실은 딴판이다.

지난달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외무·국방장관 회담에선 우리에게도 중요한 성명 하나가 채택됐다. 양국이 “대만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미일의 공동 전략목표”라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이 대만문제에 대해 이처럼 분명하게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일본은 미국과 손잡고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역할을 한 단계 더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중국은 앉아서 뒤통수를 맞았다. 미일은 후속조치로 1, 2년 안에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해 주일 미군과 자위대의 역할을 재조정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미일과 공동보조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을 의식해 미일과 거리를 둬야 하나. 미국과의 협의를 앞두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신축성’ 문제는 또 어떻게 하나. 미국은 벌써 주한미군 2사단을 미래형 사단(UEx)으로 바꿔 기동력을 높이는 작업을 올여름까지 끝낼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이슈들이 어떤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화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국민이라면 이런 소소한 국제문제에 신경 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우리의 지정학적 숙명 때문에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를 무심코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외교란 소수 엘리트가 하는 것’이라지만 전체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야 그 속에서 훌륭한 외교관도, 정책도 나온다.

어릴 때부터 국제정치적 마인드를 갖도록 해 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고전이 된 한스 모겐소 교수의 국력론(National Power)부터 시작해서 세력균형, 제국주의, 현상유지, 집단안보, 상호의존, 민주평화론 등과 같은 국제정치학의 기본 개념을 알기 쉽게 가르쳐야 한다. 국제정치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현실주의(Realism)만 제대로 이해시켜도 아이들이 죄 없이 의식화, 좌경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냉혹한 국제현실 알게 해야▼

초중고교에서도 사회 과목을 통해 국제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불어 사는 지구촌’ ‘세계시민’ ‘평화 지킴이’와 같은 내용 못지않게 영원한 적(敵)도,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담당 교사 연수 프로그램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우리가 길게 내다보고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